한국일보

“산도 물도 나도 절로”…발아래 섬진강에 봄이 흐른다

2024-03-15 (금) 순창=글 최흥수 기자
작게 크게

▶ 느린만큼 보이는 풍경 - 순창 용궐산 하늘길과 채계산 출렁다리

매화든 벚꽃이든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오르는 게 꽃 차례의 순리지만, 몸으로 느끼는 봄은 꼭 그렇지도 않다. 산골짜기 얼음장 밑에도, 눈 녹은 물에도 봄이 흐른다. 섬진강 하구에 매화꽃이 만발한 시기, 상류 전북 순창의 섬진강에도 물소리가 요란하다. 주변 산자락은 아직 겨울 색인데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골짜기를 굽이굽이 흐르는 푸른 물줄기에 완연한 봄기운이 감지된다.

■봄날 꿈결 같은 섬진강, 장군목 유원지 주변

순창 섬진강 여행은 장군목에서 시작된다. ‘장군목’은 인근 용궐산(645m)과 남쪽 무량산의 형상이 큰 장군이 자리를 잡고 앉은 모양이고 이곳이 그 목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붙인 명칭이다. 전통악기인 장구의 잘록한 허리 부분에 비유해 ‘장구목’으로도 부른다.


진안 데미섬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임실 순창 곡성 구례를 거치며 차츰 넓어져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을 경계 지으며 남해로 흘러든다. 순창은 섬진강 최상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폭도 좁고 하류처럼 넓은 모래사장도 없다.

장군목 주변 강바닥에는 밀가루 반죽이 굳은 듯 하얗고 특이한 모양의 바위 군상이 약 3㎞ 구간에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절구통처럼 속이 매끈하게 깎이고 파인 ‘요강바위’는 장군목의 상징이다. 높이 2m, 폭 3m, 무게가 15톤이나 되는 바위로, 한국전쟁 때 빨치산 토벌대에 쫓기던 마을 주민이 이 구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93년에는 인근 마을로 이주해 온 사람이 그 독특한 모양새가 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크레인을 동원해 반출했다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1년 6개월 만에 되찾아오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다행히 강 한가운데 원래 자리를 되찾은 요강바위는 물이 많지 않을 때에 바로 앞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수량이 많아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다. 바로 위 자전거도로 교량 위에 서면 요강바위와 주변을 흐르는 강물 소리가 맑고 청량하다.

상류 임실의 천담마을, 구담마을과 함께 장군목 유원지 일대는 섬진강의 옛 모습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아름다운 시절(1998년)’을 촬영하기도 했다. 봄날이면 영화 제목처럼 꿈결같이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인공 산책로 ‘하늘길’이 왜 필요할까 싶은데…

장군목 바로 아래 용궐산은 산 중턱에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수직 암벽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워낙 크고 가팔라 감히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데, 2020년 지그재그로 1,010m 길이의 덱 탐방로를 조성하여 이제는 수월하게 오를 수 있게 됐다. 발아래로 아스라이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아 아찔함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이름하여 ‘용궐산 하늘길’이다.


용궐산은 원래 용골산(龍骨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용처럼 골격이 우람한 산이라 해석할 법도 한데, 한편으로 ‘용의 뼈다귀’에서 죽음이 연상된다. 결국 2009년 주민들의 요구로 산 이름은 ‘용이 사는 대궐’이라는 의미의 용궐산(龍闕山)으로 바뀌었다. 용의 기운처럼 생동감 넘치는 산이기를 바라는 뜻은 하늘길 개통으로 관광객이 몰리며 현실화했다.

하늘길 산행은 섬진강과 맞닿은 용궐산 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된다. 정상까지는 약 3km, 왕복 4시간가량 소요되지만, 대개는 하늘길이 끝나는 암벽 위 비룡정을 목적지로 잡는다. 왕복 3.2km, 일반적으로 2시간이 걸리고, 3시간을 잡으면 느긋하게 산과 강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입장료(4,000원)의 절반은 순창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거리에 비해 산행은 만만치 않다. 매표소를 지나면 곧장 험한 바위가 깔린 계단이 이어진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고 바닥이 가지런하지 못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가파른 경사에 삭막한 바위 지대임에도 탐방로 주변에 나무가 울창해 여름에는 그늘이 넉넉할 것으로 보인다. 바위 지대가 끝나고 아래서 보던 커다란 암벽과 마주하는 지점부터 덱 탐방로가 설치돼 있다. 한쪽 끝에서 계단을 올라 한동안 평평한 길을 걷다가 맞은편 끝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는 식으로, 산허리 암벽에 걸린 4단 구조의 덱 탐방로다.

사실 용궐산 자체는 경관이 빼어나다고 하기 힘들다. 큰돈을 들여 이런 시설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걸으면 걸을수록 진가가 드러난다. 중간중간 설치된 쉼터 겸 전망대에서 한숨 돌릴 때마다 섬진강 물줄기와 산줄기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물이 아니면 강이 아름다울 수 없고 강이 아니면 산이 빼어날 수 없다. 용궐산 하늘길 풍광은 강과 산이 한데 어울림으로 완성된다. 섬진강 덕분에 비로소 생명을 얻고 살아 꿈틀거리는 산이다.

■채계산 출렁다리와 향가유원지

용궐산에서 섬진강 하류로 약 11㎞ 내려가면 채계산(342m)이 있다. 회문산, 강천산과 더불어 순창의 3대 명산으로 꼽히는 산으로 화산이나 적성산으로도 불리고, 바위가 책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 책여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적성강(이 구역 섬진강을 이렇게 부른다)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비녀 꽂은 여인이 달을 보며 누운 형상이라 월하미인(月下美人)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외에 고려 말 최영 장군이 화살보다 늦었다고 말의 목을 베고 후회했다는 전설, 원님 부인을 희롱한 금 돼지 설화 등의 이야기를 간직한 것을 보면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예사롭지 않게 여기는 산이다.

산은 순창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적성면 채계산과 동계면 채계산으로 구분되는데, 2020년 둘을 하나로 잇는 출렁다리가 개설됐다. 최고 90m 높이에 매달린 길이 270m 현수교는 아래서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출렁다리를 직접 걸으려면 제법 발품을 팔아야 한다. 주차장에서 다리 입구까지는 약 500개 계단으로 이어진다. 거리는 짧지만 쉬지 않고 오르기엔 숨이 차오른다. 지지대 없이 허공에 매달린 출렁다리는 중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가 맞은편으로 이어진다. 이름처럼 흔들림이 제법 심해 짜릿함이 온몸에 전해지는데, 서편으로 한층 넓어진 섬진강 줄기가 마을과 들판 사이로 평화롭게 흐르고 있다.

<순창=글 최흥수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