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이든과 “늙은 사자의 포효”

2024-03-12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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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의 책무의 하나는 정기적으로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의회에 보내는 것이다. 연방 헌법 2장 3부 1조는 대통령은 “의회에 연방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주고 필요하고 유익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라고 돼 있다.

국정 연설은 통상 지금 미국의 상황과 지금까지 이룬 업적, 앞으로의 과제 등을 열거하며 야당의 협조를 촉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난 주 바이든의 연설은 이와 달랐다. 초장부터 전임자 루저 도널드와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어째서 다시는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되는가를 강조했다. 그를 13번이나 언급하면서 단 한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전임자”로 지칭한 것도 특이하다.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싫었던 모양이다.

그는 루저 도널드가 국방비를 충분히 내지 않은 나토 동맹국을 러시아가 침공하도록 부추기겠다는 망언을 한 것과 2020년 대선에서 지고도 이를 뒤집기 위해 폭도들을 선동해 의사당에 난입하게 한 사실을 지적하며 미국 민주주의가 국내외 양쪽에서 위협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후 1시간이 넘는 발언을 통해 여러 문제를 지적했지만 나머지는 제일 먼저 제기한 이슈의 중요성에 비하면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만에 하나 2020년 대선에서 지고도 자기가 이겼다고 우기며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방해하려던 루저 도널드가 다시 백악관에 들어간다면 미국의 힘에 의지하던 세계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고 미국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것이 뻔하다. 경제가 성장을 하고 못하고, 인플레가 오르고 내리고는 늘 되풀이되는 현상이지만 한번 무너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다시 되살리기는 극히 어렵다.

해마다 대선을 앞두고 이번 대선이야말로 미 역사상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올 대선이야말로 정말 그렇다. 미국이 루저 도널드로 대표되는 중우정치의 위협을 극복하고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를 계속해나가느냐 아니면 중남미 바나나 공화국 수준으로 떨어지느냐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든이 국정 연설을 통해 현 미국의 상황이 민주주의 수호 대 반민주 세력의 내전 상태라고 본 것은 매우 적절하다.

얼마 전까지 루저 도널드 지지자는 물론이고 대다수 미국인들도 과연 늙은 바이든이 이길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바이든이 국정 연설을 하며 보여준 모습은 이런 우려를 잠재울 정도로 열기에 차 있었다.

그를 보면서 생각난 것이 199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를 앞 둔 테드 케네디의 모습이다. 당시로서는 고령인 60이 넘은데다 교통 사고를 일으킨 뒤 동승한 여성은 빠져 죽게 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채퍼키딕 사고 25주년에 조카까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고 빌 클린턴의 실정으로 민주당의 참패가 예상되면서 케네디의 정치 생명도 끝났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갤럽 조사에서는 그의 지지율이 22%를 기록했고 보스턴 헤럴드 조사 결과는 매사추세츠 주민 62%가 그의 출마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2차 모기지 융자까지 받아 선거 자금을 마련하는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 당시 공화당의 뜨는 별 밋 롬니를 꺾고 승리했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은 “늙은 사자가 울부짖었다”(The Old Lion Roared)고 적었다. 그후 그는 2000년과 2006년 재선에 성공하고 2008년 대선 경선에서 새 세대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버락 오바마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첫 흑인 대통령을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바이든이 나이가 많은 것도, 과도한 돈 풀기로 인플레를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구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어줄 과도기형 지도자인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숱한 단점은 루저 도널드와 비교하면 새털보다 가볍다. 그는 최소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존경심을 갖고 있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알고 있는 인물이다.

반면 루저 도널드는 세계화와 기술 혁신에 뒤지고 이민자에도 밀린 백인과 기독교 루저들의 분노와 불안, 질투심을 이용해 권력을 얻은 후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털고 자신을 괴롭한 자들에 대한 보복을 하겠다는 것 이외에는 머리에 든 게 없다.

얼마 전까지 여론 조사는 대체로 바이든이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지난 주 에머슨대 조사는 바이든과 루저 도널드가 45대 45로 동률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 가운데는 51대 49로 바이든이 앞섰다.

올 대선은 이제부터 시작이며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루저 도널드가 다시 이길 경우 우리가 아는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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