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어이 오게하는 그 무엇

2024-03-08 (금) 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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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온다. 일정한 보폭으로 늠름하게 혹은 우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젯밤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나 눈부신 아침이다.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간밤엔 바람이 어찌나 매몰차게 부는지 닫힌 창을 통해서도 세찬 소리를 내더니 급기야는 전기가 나갔다. 밤 8시부터 화상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열 시즈음 전기와 인터넷이 끊겨 마지막 인사 말도 못 한 채 마쳐야 했다. 그 모임은 문인회가 주정부의 그랜트를 신청하기 위해, 지난 3년간의 자료를 정리해 요구되는 보고 양식을 준비하려 한 것이었다. 회장인 나와 이전 재무 담당 두 임원과 현 재무담당 자까지 넷이 모였는데, 문제는 그렇게 끊기기 직전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져 “그냥 다 포기하고 말자”고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잠자리에 든 후 아침에 눈을 뜨니, 가득한 햇살로 방 안은 따스했고 눈부셨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는 그랜트가 내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고생만 할 일을 시작했다고 다 포기하고 말 거라 생각했었다. 2016년 내가 문인회 재무를 맡게 되자마자 문인회를 비영리단체로 미 국세청에 등록하고, 비영리단체에 요구되는 재무 보고를 고려해 은행보고서상의 잔액과 수입, 지출 등을 상세히 기록한 후 매년 보고를 했었다. 하지만, 2년간 내 임기가 끝나고 후임자들은 그 양식을 무시한 채 예전하던 대로 대충 재무를 해왔고, 설립한 지 삼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미국법에서 비영리단체에 요구하는 기본적 틀도 갖추지 않아 그랜트 신청을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다.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컴퓨터를 켜, 문인회 이메일을 확인한다. 한 수필가가 한국일보 “내가 읽은 명작” 기획코너에 보낼 글을 보내왔다. 올 초 이곳 한국일보의 편집국장이 문인회 회원이 돌아가며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기획코너를 제안해 왔다. 워싱턴문인회는 네 문학회(시, 소설, 수필, 영문학)로 구성된 지라 각 문학회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도록 분배하기 위해 각 문학회 리더들에게 회원 순서를 정하고 각자 정한 작품명과 글을 가능한 한 미리 써 제출해달라 일렀다. 처음 시도된 일인지라 여러 회원이 우왕좌왕 질문을 하고, 완성도 높은 글을 위해 자신의 글을, 합평을 거쳐 수정한 후 보내라 하니 “내 글을 편집하려면 참여 안 하겠다”는 등 처음부터 덜거덕거렸다.

그래도 “젊은(?) 새 회장이 일을 맡아 애쓰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리다” 하며 역할을 해주시는 분들이 글을 내게 보내와 신문사에 보내기 전 먼저 읽는 영광을 누린다. 선배 수필가의 명작 소개 글을 읽으며, 2015년에 문인회에 들어와 이제까지 함께한 감사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함께 웃고 즐거웠던 순간, 함께 나눈 글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던 순간, 고국을 떠나와 멀리 계신 부모님 대신 자상히 대해주시는 부모님 연배의 글 선배님들. 그 기억이 비틀거리는 나를 일으켜 세워, 어젯밤 인사를 하지 못한 세 분께 이메일을 쓴다. 그리고 그랜트 신청 관련 전, 현 임원에게 업데이트 이메일을 보낸다.

“비영리단체로 등록된 이상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틀을 촉박한 시간 내에 마련하려 애를 썼지만, 올해 신청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34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문인회인데, 그랜트보다 더 중한 것은 왜 이런 틀이 필요하고, 문인회라는 단체가 갖는 이 미국 사회 속에서의 역할, 서로가 나누어져야 할 책임 등을 먼저 공유하고 공감대가 형성된 후에야 진행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1년간 모든 분이 협력하시고, 문인회 회원들께도 여러 만남을 통해 소통하여 내년에는 도전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을 여니, 바람은 여전히 매섭게 차다. 봄이 기어이 오는 것은 신이 사랑을 놓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봄은 기어이 올 것이다.

<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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