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별칼럼] 연방대법, 트럼프의 시간끌기 방조

2024-03-04 (월) 루스 마커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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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대법원이 2020년 대선 뒤집기 시도와 관련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면책 특권 주장을 7주 뒤인 4월22일 구두변론을 시작으로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예상되는 판결은 두 갈래로 갈리지만 어느 쪽이건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대법원의 이번 결정에 따라 당초 3월4일로 예정됐던 대선 뒤집기 시도혐의 관련 연방법원 재판은 2024 대선 이후, 혹은 대선일 1-2개월 전인 9월말이나 10월에야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혼란이 전적으로 연방대법원 탓은 아니지만, 필요이상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대법원의 심리 결정 자체가 아니라 지나치게 한가로운 타이밍이다. 최상의 타이밍은 잭 스미스 특별검사가 연방고등법원의 재판에 앞서 대법원이 대통령의 면책특권에 관한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던 지난해 12월이다. 그때로부터 이미 두달 반이 덧없이 지났다. 반면 대법원의 이번 결정은 트럼프 변호인 측이 대법원의 개입을 요청한지 불과 2주 만에 나왔다. 게다가 구두변론은 4월22일에야 시작된다. 이 경우 대법원의 판결은 빨라야 5월, 아니면 회기가 끝나는 6월말에 나온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대법원은 면책특권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3월로 예정된 연방 재판을 위한 준비를 허용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면책특권 심리를 빌미삼아 다른 연방재판을 선거일 이후로 미루려는 트럼프의 계획은 틀어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연방대법원은 좀처럼 보기 드문 ‘회피 절차’를 밟았다. 대법원은 연방 고등법원의 재판 개시 결정을 유예해달라는 트럼프 변호인단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피고인 측이 판결 유예신청을 요구할 때 적용되는 까다로운 절차를 피하면서 그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최고법원의 명령을 연방법원에 하달했다.

어찌됐건 결론은 트럼프 관련 재판의 모든 재판전 소송절차(pre-trial proceedings)가 동결됐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2020년 대선 패배불복 및 불법선거 방해 혐의 재판을 맡은 타니아 S. 추트칸 연방판사가 원고와 피고측 모두 88일의 변론준비 기일을 필요로 할 것으로 추산했기 때문에 재판을 재개하라는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온 후 석달 가까이 지나야 비로소 본 재판에 들어가게 된다. 아무리 빨라도 9월에야 재판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 트럼프는 법원의 피고석에 앉아있는 대신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절충같지 않은 절충의 표본을 보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보수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현재 9인의 연방 대법관 가운데 6명이 보수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세 명이 트럼프에 의해 임명됐다.) 당파적 동기를 차지하더라도 보수적인 일부 대법관들은 재판 일정이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통념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을 터이고, 따라서 규칙적인 순서에 따라 이 케이스를 심리하길 원했을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입장이다. 대법원의 올해 회기 일정이 이미 결정됐기 때문에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는 10월로 트럼프 면책 심리를 넘기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7월에 구두변론을 시작한다는 느긋한 심리진행 속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법원은 심리를 앞당기고 싶은 경우 어떻게 해야할 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콜로라도 법원의 트럼프 공화당 경선후보 자격 박탈 결정을 예로 들어보자. 트럼트는 지난 1월3일 콜로라도 주 대법원의 결정을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연방대법은 단 이틀만에 상고를 받아들였고, 2월5일부터 심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콜로라도 프라이머리가 3월5일 수퍼 화요일에 치러지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연방대법원 판결은 어디쯤 왔을까?) 여기서도 일부 대법관들은 심리 진행속도를 늦추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보인다. 단 세명에 불과한 진보성향 법관들의 협상력으론 좋은 흥정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일부 대법관들은 대법원의 심리일정과 선거일정의 충돌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만일 메릭 갈랜드 법무장관이 3년전 트럼프가 취한 행동과 관련해 신속한 법적 조치를 취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의 사법부는 우리가 처한 문제 그 자체이다. 좀 더 지켜보면 알겠지만 연방대법원이 판결해야 할 문제에 어떤 프레임을 씌우냐에 따라 심리는 더 지연될 수 있다. “만약 특권이 인정된다면 전 대통령이 재임중에 행한 공식적 행동의 면책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프레임이 좋은 본보기다.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3인 재판부는 만장일치로 트럼프의 완전한 면책특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럼프의 면책특권을 2021년 1월6일 의회난입사건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맥락에서 바라본 다른 항소법원과 달리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 3인 재판부는 트럼프의 행동이 대통령의 공무에 속하는지 아니면 현직에서 물러난 대통령후보에게 면책특권이 적용되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방대법관들은 워싱턴 D.C. 항소법원에 트럼프가 저질렀다는 공무에 속한 범죄행위를 가려내라고 판결할 수 있다. 이 경우 재판진행은 지체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대통령 면책특권이라는 성공가능성이 없는 카드를 꺼내든 것은 순전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여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그의 카드는 부적같은 효험을 발휘했다. 연방대법원은 속이 훤히 보이는 트럼프의 지연전술을 방조하고 있다.

<루스 마커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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