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별 칼럼]트럼프 재판과 사법 정의

2024-04-01 (월) 제니퍼 루빈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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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0여건에 달하는 범죄혐의로 네차례 기소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형사재판이 끝 모르게 연기되고, 자산가지 조작 등의 사기혐의로 뉴욕 맨해튼 지방법원이 선고한 막대한 벌금 또한 항소법원에 의해 축소되자 미국인들 사이에 분노어린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의 변호인단은 상상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재판절차를 최대한 뒤로 미루는 지연작전을 구사한다. 물론 트럼프에게 전직 대통령 겸 차기 대통령 후보라는 특수한 지위와 천문학적 액수의 법률비용을 감당할 재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균적인 형사 피고인과 달리 그는 아무런 ‘뒷탈’ 없이 담당판사와 검사 및 법원관계자들에 관해 맘껏 ‘장외 험담’을 퍼붓는 호사를 누린다.

트럼프는 이번에도 법적 승리를 거두었다. 뉴욕항소법원은 뉴욕지법의 판결에 따라 트럼프가 공탁해야 할 4억6,400만 달러의 벌금을 1억7,500만 달러로 낮추어주고, 10일간의 말미를 주었다. 판사가 지명한 감독관의 감독을 받아야하고, 뉴욕 소재 은행에서 공탁금 용도의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단서조항은 그대로 유지됐지만 거액의 공탁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트럼프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모든 항소가 소진된 후 트럼프는 거의 틀림없이 1심 법원이 부과한 막대한 벌금을 납부해야 할 것이다.

형사소송 측면에서, 트럼프 변호인단은 재판 일정을 늦출 목적으로 법적근거가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연이어 제기했다. 플로리다 연방법원의 기밀문서 유출 재판에서 트럼프 측은 재판진행을 사실상 완전히 멈춰 세웠다. 트럼프가 임명한 아일린 캐넌 연방지법 판사가 변호인 측이 제기한 검찰 공소기각 신청을 심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법률팀이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억지 지연 전술임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캐넌 판사는 변호인 측에 브리핑을 요구하고, 그들의 구두변론까지 경청한 후에야 청구를 기각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공소기각 요청 심리로 트럼프 팀의 시간 끌기에 동조한 셈이다.


제11 연방순회항소법원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플로리다지법의 기밀문서 유출재판은 수 개월간 추가로 지연될 수 있다. 더욱 고약한 것은 일단 배심원단이 꾸려지면 캐넌 판사의 그릇된 결정 하나만으로 검찰 측은 소송을 이어갈 방도를 상실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는 국가안보를 훼손하고 수사를 방해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사법 시스팀이 지닌 ‘이중잣대’의 진수를 보게 된다.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에서 진행되는 대선뒤집기 혐의 관련 형사소송에서 트럼프와 그의 법률 하수인들은 최근 엇갈린 성과를 올렸다. 패니 T. 윌리스 풀턴 카운티 검사장(민주)은 트럼프 변호인단이 제기한 허울 좋은 기피신청을 견뎌냈지만 이로 인해 재판 일정이 지연됐다. (대다수의 피고인은 담당 검사 기피신청을 할만한 재정적 여력이나 배짱을 갖고 있지 않다.) 윌리스 검사장은 8월 중에 재판을 시작하자고 요청하겠지만 사안이 워낙 까다롭고 복잡해 더 많은 준비 기일이 필요하다는 변호인단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재집권에 실패한다 해도 2025년에야 배심원단과 마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2021년 1월6일의 의사당 폭동사건으로 이어진 트럼프의 ‘대선 뒤집기’ 혐의 관련 형사재판이 어디쯤 와있는지 살펴보자. 연방대법원의 느긋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주장하는 대통령의 완전한 면책 특권에 관한 결정은 아무리 늦어도 6월 중에 나올 것이다. 대통령이 재임 중 저지른 범죄에 연방대법원이 면죄부를 쥐어줄 것으로 예상하는 법조계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대법원의 판결이 6월중에 나온다면 잭 스미스 특검은 가을에 재판을 시작하려 들 것이다. 저스트 시큐리티 공동창업주인 라이언 굿맨과 전직 검사인 앤드류 와이스만은 “사실관계와 상당량의 증거가 이미 변호인단에 주어진 케이스”라며 신속한 재판 진행으로 정부, 피고와 유권자들이 적시에 평결을 접할 수 있도록 잭 스미스 특검은 재판 개시일을 가능한 한 일찍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필사적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없이 차근차근 법정으로 향하는 케이스도 있다. 앨빈 브래그 뉴욕 맨해튼 지방검사장이 이끈 수사팀은 트럼프와 그의 골수 지지자들의 온갖 협박과 방해공작을 이겨내며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회사 비용으로 지급한 성추문 입막음 돈을 기업 장부에 ‘법률 자문료’로 허위기재한 문서조 의혹을 파헤쳐 사상 처음으로 전 대통령을 형사 기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맨해튼 형사법정의 후안 메르찬 판사도 법 아래 평등한 정의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실이 보여주었다. 메르찬 판사는 트럼프의 근거 없는 면책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실관계 입증에 필요한 증거 차단시도를 막아냈다. 또한 ‘변호인 권고’처럼 얼핏 정당한 듯 들리는 변호인단의 궤변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막판 변명이나 본건과 관련 없는 주장에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

뉴욕 남부 연방지검 검사가 뒤늦게 공개한 수천 쪽 분량의 문서와 관련해 열린 청문회에서 메르찬 판사는 재판일정을 미루기 위해 일부러 한참을 기다리다 재판에 임박해서야 검찰 측 자료 추가공개를 요구하며 소환장을 발부한 트럼프 변호팀을 호되게 질책했다. 그는 “이제까지 검찰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 이상의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작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라며 공판 개시일을 4월15일로 못 박았다. 이 모든 것에 보태 메르찬 판사는 (트럼프가) 증인, 검사와 배심원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듯 “재판 상대를 겨냥한 전직 대통령의 분노에 찬 수사를 제어하려는 노력”이다. 이 신문에 따르면 “메르찬 판사는 트럼프가 대배심과 검사 등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낸 일련의 적대적 발언을 인용하며, 이번 재판의 배심원들에 대한 일체의 코멘트를 금지한다고 명령했다.”

요약하자면 일부 트럼프 재판은 대선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트럼프는 마라라고 기밀문서 반출 및 불법 저장혐의를 털어낼 수도 있다. 뉴욕 민사재판의 벌금 액수 역시 대폭 축소될지 모른다. 트럼프보다 주머니가 가벼운 피고인은 도저히 누리지 못할 행운이다. 그러나 워싱턴 D.C.와 맨해튼 연방지법의 강골 판사들이 그들이 해야할 일을 하고 있고, 중요한 민사소송건 역시 더 이상의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앞으로 3주 이내에 전직 대통령은 그토록 오랫동안 악착같이 피하려했던 형사법정에서 배심원단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 오직 유권자들만이 법망에 사로잡힌 트럼프를 빼낼 수 있다. 골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11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트럼프는 법의 그물망을 찢고 멀쩡히 빠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법정의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유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제니퍼 루빈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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