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광덕 칼럼] 잔인한 4월의 ‘체제 전쟁’

2024-03-07 (목)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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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영화 ‘건국전쟁’이 개봉 21일 만에 관객 82만 명을 모으는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김덕영 감독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다룬 ‘건국전쟁’에는 4·10 총선의 여야 사령탑이 모두 등장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이 영화에 소개된다. 한 위원장은 지난해 법무부 장관 시절 ‘농지 개혁의 수혜자인 농민들이 6·25전쟁 때 나라를 지켰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1년에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고 말한 내용도 영화에 나온다. 대한민국 건국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이 ‘빛’과 ‘그림자’로 대비된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 대표의 경제·안보관도 대척점에 있다. ‘확장 재정’을 외치는 이 대표는 기본 소득·주택·대출 공약을 제시한 데 이어 최근 ‘출생기본소득’까지 제안했다. 그는 지난 대선 전에 “외국 빚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나랏빚은 곧 민간의 자산”이라는 궤변을 펴면서 선심 공약을 쏟아냈다. 반면 윤 대통령은 “재정을 더 늘리면 물가 때문에 또 서민들이 죽는다”면서 긴축재정을 강조하고 있다.

외교안보 노선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윤석열 정부의 기본 입장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공조 강화, 북핵 폐기다. 반면 민주당은 한미 동맹에 너무 경도되지 말고 북중러와도 우호적으로 지내며 균형적 외교를 하자는 것이다. 툭하면 반일 정서를 부추긴다. 윤 대통령은 “힘에 의한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자”면서 국방력 강화를 역설하지만 이 대표는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을 겨냥해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고 주장한다.


이 대표가 주도하는 야권의 비례연합정당인 ‘민주개혁진보연합’에는 친북·반미·좌파 성향 인사들이 포진한 군소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해 논란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정당’ 판정을 받은 통합진보당의 후신인 진보당도 그중 하나다. 진보당의 강령에는 ‘불평등한 한미 관계 해체’ ‘재벌 독점 경제 해체’ 등이 들어있다. 이러니 민주당이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는 인사들의 국회 진입 길을 터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대 정당의 정강 정책에서도 경제·안보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민주당의 정강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토지 공공성’ ‘재정 민주주의’ ‘전 생애 기본생활 보장’ ‘노동이사제 확대’ ‘원자력 에너지 줄이기’ 등을 강조한다. ‘러시아·중국 등과의 협력 강화’ ‘남북 간 일체의 적대 행위 중지’ 등도 들어있다. 반면 국민의힘은 정강에서 ‘자유와 인권 보장’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평화통일’ ‘공정한 기회 부여’ ‘재정의 지속 가능성’ ‘안정적이고 유연한 노동시장 조성’ 등을 키워드로 내세운다.

이쯤 되면 4월 총선을 관통하는 핵심 성격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다. 단순히 ‘윤석열·이재명 대선 2라운드’ 또는 ‘정권 심판론과 거야(巨野) 심판론 대결’로만 볼 수 없다. 이번 총선은 결국 대한민국호(號)의 항로를 결정하는 ‘체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총선 결과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대표적 사례인 그리스가 요즘 주목을 받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가 부도 위기를 겪었던 그리스가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다섯 가지 경제지표를 종합 평가해 최고의 성과를 낸 국가로 그리스를 선정했다. 한때 고도성장의 길을 걷던 그리스는 과도한 무상 복지 등 포퓰리즘 정책 확대로 국가부채가 급증해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 그 뒤 2019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중도 우파 정치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규제 혁파, 감세, 연금제도 수술 등 시장 친화적 정책을 밀어붙여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초타키스가 이끄는 신민주주의당은 지난해 5월 총선에서도 41%를 득표해 선심 공약을 쏟아낸 알렉시스 치프라스 전 총리의 급진 좌파 연합을 두 배 이상의 차이로 따돌렸다.

두 차례 총선을 거치며 ‘포퓰리즘 망국’의 늪에서 벗어난 그리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때다. 어떤 경제·안보 체제를 선택하느냐는 결국 국민들의 몫이다. ‘잔인한 달’ 4월에 유권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렸다.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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