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화 전망대

2024-03-01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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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를 내리고 고갱을 걸자’ – 손흥민, 이강인 사태를 보며-

모차르트는 인류가 낳은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였다. 여기서 최초라는 수식어는 조금 더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아무튼 작곡가로서 가장 많은 자유를 누렸던 작곡가가 바로 모차르트였다. 베토벤도 프리랜서 작곡가였지만 베토벤은 귀족들의 후원에 크게 의존했고 하이든 역시 귀족들 밑에서 평생 고용살이를 했다. 흔히 길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그 뛰어난 재주를 이용, 귀족들 밑에서 잘 먹고 잘 살수 있었지만 왜 모차르트는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택했을까? 안봐도 추측할 수 있겠지만 첫째도 자유, 둘째도 자유였을 것이다. 자유로운 자만이 예술을 창조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단명한 역사가 말해주듯,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아마도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겠다고 배수진을 친 일이었을 것이다. 벼랑 끝에 섰을 때 만이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100% 발휘할 수 있다. 능력만 믿고 게으름을 부리는 천재를 우리는 천재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력하는 천재가 사실은 진정한 천재인 것이다. 끊임없는 탐구정신, 창의력… 배수진까지 치면서 몸부림치는 절박함… 그것을 우리는 진정한 프로정신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요사이 한국에서 축구선수 손흥민과 이강인의 다툼이 화제가 되고 있다. 요르단과의 아시안컵 대회 준결승을 앞두고 서로 멱살잡이를 했다는 것인데 그 진의는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아무튼 손흥민과 이강인의 다툼이 노력형과 천재형의 다툼으로 번지는 추세다. 누가 노력형이고 누가 천재형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말한대로 노력하지 않는 천재를 우리는 진정한 천재라고 부르지 않는다. 손흥민이 천재였다면 그것은 진정코 하루아침에 탄생한 천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처럼 배수진을 치고 죽기살기로 분투하지 않는 천재란 없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다툼이 권위주의 내지는 한국의 문화적인 이유때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얼마전 매일경제에 게제된 베스트셀러 작가 마크 맨슨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칼럼을 본 적이 있었다. 마크 맨슨은 한국이 실적 위주의 사회환경과 체면문화에 시달리는 사회라는 진단을 내렸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자살율이 높은 것은 일등 위주의 강박관념 때문이며 이는 개인의 자유로움 보다는 결과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사회적 관념에 짓눌려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마크 맨슨의 진단이 100%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본보 본국지에 게재된 ‘고흐를 내리고 고갱을 걸자’라는 칼럼(이상현 한옥 연구소장)에서도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즉 눈앞의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던 고흐보다는 눈앞의 대상을 상상력을 통해 전혀 다르게 표현했던 고갱식의 교육을 권장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강인이 고갱이고 손흥민이 고흐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출세위주의 모든 유교식 교육환경은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었다. 상상력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없는 인생이 결코 행복할리는 없다. 사실 진정한 행복이란 본인 스스로 홀로서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만들어지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한명의 베토벤 혹은 모차르트를 길러내기 위해 혹은 손흥민이나 이강인을 길러내기 위해 열명의 다른 천재들을 희생시키는 것 보다는 오래 기다리며 그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풍토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크 맨슨이 지적한 바 대로 가족 사랑의 유교적 좋은 풍토는 지켜나가되 (이번 축구사태처럼) 체면문화나 권위주의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우울하고 경직된 사회로 욕먹는 풍토는 사라져야하지 않을까?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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