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홀로 할머니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용서

2024-02-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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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정/주부

몇해 전 캐어기버로 일하면서 돌본 86세 동네 할머니 얘기를 할까 해요.
할머니와의 인연은 저의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쯤 동네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후 시작되었어요. 한국사람이 별로 없는 동네이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가까워졌고 할머니의 부탁으로 저는 오전에 아들이 학교에 가 있는 몇시간 동안 할머니의 정서적 캐어기버로 다양한 수업을 진행해 드렸어요. 할머니댁에 방문해서 요일별로 시와 일기쓰기, 노래 부르기, 그림 그리기, 스트레칭과 요가 등 제가 가진 재능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드리며 더욱 가까워진 어느 날, 할머니는 저에게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어요.
집안의 격차가 너무 커 시댁에서 할머니를 반기지 않으셨지만 혼전임신으로 겨우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데 아들을 낳아 돌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미국유학을 떠났다는 슬픈 이야기와 아이가 조금 커서 미국에 와보니 남편은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아 살림을 차려 살고 있더라는 사랑과 전쟁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내시면서 긴 한숨을 쉬기도 하셨어요.
그렇게 평생 외아들을 미국에서 홀로 키워내 장가보내고 나니 큰집에서 덩그러니 다시 홀로 할머니가 되었다며 혼자가 익숙하고 익숙해져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하셨어요.
수년전에 발병한 파킨슨병은 더 혼자가 되게 만들었다며 몸을 떠시며 “민성이 엄마, 참 좋을 때다. 아기 키울 때가 제일 예쁘고 신나는 시절이야!”라고 하시며 서러움이 깊이 내려 앉아 더 고독한 미소를 보이셨어요.
한참 후 할머니의 파킨슨병세는 더욱 깊어져 거동이 힘들고 기억마저 급속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해서 병원과 아들내외의 신세를 져야 했기에 할머니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멈췄지만 할머니께서 저에게 남기고 간 여운은 꽤 오래 간 것 같아요. 그 여운은 저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용서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든 것 같아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할머니는 그 두사람을 용서했다고 하셨어요. 용서는 상대가 빌러 와야만 하는게 아니라 내안에서 스스로 용서하는 성스러운 것이고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요. 또, 용서 없는 삶이 풍요로울 수 없고 용서 없는 죽음이 아름다울 수 없다고도 하셨어요.
삶과 죽음의 해답이 사랑이라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하던 유명가수의 노래가사와 할머니의 말씀은 꼭 닮은 것 같았어요. 오늘부터 당장 내가 용서를 해야 할 사람과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야 겠어요. 삶과 죽음이 사랑이 되려면 용서를 해야만 하고 용서를 빌어야만 하니까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홀로 할머니께 감사드리며, 그럼 다음 주 목요일에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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