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의견] ‘건국 대통령 이승만’

2024-02-28 (수)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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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흐터지면 죽습네다.’ 1945년 10월19일 여의도 비행장으로 귀국한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도착일성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한국의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며 흥행몰이를 하고있다. 독립운동가요 위대한 민족지도자였던 이승만은 그가 이룩한 수많은 역사적 위업에도 불구하고 3.15 부정선거와 독재자라는 그늘에 가려져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아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가 서거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나마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각각 철학석사,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선의 청년 이승만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50여년을 해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훗날 국민들이 자유와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는 전시 대통령으로서 백척간두 위기에 처한 나라를 이끌었으며 휴전 후에는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가 안보를 공고히 다졌다.

이승만을 부정선거의 원흉이라고 하나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은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당선이 확정된 상태였다.

선거 직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마산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졌고 서울에서는 4.19 학생데모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학생들이 죽고 다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승만은 부상학생들을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눈물로 사과하면서 ‘불의에 항거하지 않는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85세 고령의 이승만 박사가 인의 장막에 가로막혀 공권력이 자행한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하나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하던 해방 직후의 혼란정국과 나라를 세운지 2년도 채 안되어 일어난 한국전쟁 난리통에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하여서는 이승만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필요하였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와 학생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60년 4월26일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하야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5년만인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한 요양병원에서 9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이제는 호국영령(護國英靈)이 되신 국부(國父) 이승만 박사께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신다면 그 감회가 어떠하실까.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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