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삶, 그리고 떠남

2024-02-28 (수)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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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란 말은 시간에서 탄생했다. 왔다 갔다 반복하며 흘러가는 것이 오늘이다. 강물이 마지막에 큰 바다에 잠겨버리듯 오늘도 어디론가 가서 다시 오지 않는다. 물리학이 시간을 하나의 진동으로 본다면 떠남이란 죽음도 일종의 진동과 같다.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끝이 죽음이라 여긴다. 죽음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현상임을 알면서도 죽음이란 단어는 무섭고 두렵다.

의사와 성직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현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병원이나 호스피스 병실에서 주로 사망한다. 그런 이유로 정신과의사도 죽어가는 사람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죽음의 침상에 조용히 누워있던 임종이 가까운 환자, 혹은 말기 치매환자가 갑자기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사례들이 심심찮게 보고된다. 그들은 한 동안 정상인처럼 가족 친지들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눈 뒤 다시 혼수상태로 돌아가 가족과 의사를 당황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말기선명성(Terminal Lucidity)이라 부른다. 특히 치매 말기 환자는 인지기능이 거의 없어져 자신까지도 잊어버린 상태이기에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임종이 가깝지 않은 정신분열증 환자도 잠시 동안 보통 사람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때는 역설적 선명성(Paradoxical Lucidity)이라 한다. 임상에서는 보통 말기 선명성과 역설적 선명성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의학은 삶에 중점을 두는 학문이다. 과거 의학은 죽음을 삶의 적으로 생각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 심폐소생술 발달로 잠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죽음체험 얘기(근사체험)는 이제 의학이 삶뿐 아니라 죽음도 연구해야하는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근사 체험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주위환경을 관찰하거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전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거나, 먼저 사망한 가족 친지들이 광채 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등등이다. 최근에는 역설적 선명성, 말기 선명성 같이 의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도 죽음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말기 질환으로 임종이 가까운 사람들은 죽음 자체보다 다가오는 통증이 더 두렵다. 통증을 견디지 못해 부적절한 언행을 보이면 여태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줄까 하는 걱정에서다. 그래서 담당의사는 말기 환자의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보통 몰핀을 많이 쓰는데 일부 의사는 몰핀의 부작용이나 중독이 염려스러워 잘 처방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히포크라테스의 금언은 통증에 괴로워하는 말기 환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종교적 개념을 떠나 죽음 후에 영혼이 떠나간다거나 천당과 지옥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근사체험과 말기 선명성은 어느 정도 과학적, 의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즉 어느 생명체든 죽음의 코너에 몰리게 되면 자신이 모르는 초자연적 에너지(힘)가 생겨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도망갈 데 없는 쥐가 포식자인 고양이를 멈칫하게 만들 듯, 말기 환자도 임종 직전에 어떤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온 힘을 다해 죽음과 마지막 싸움을 하는지도 모른다. 죽음 직전 가쁘게 몰아쉬는 체인 스토크(Cheyne Stoke) 호흡, 말기 선명성, 역설적 선명성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실제 임상에서 가끔 접하는 역설적 말기 선명성은 잠시나마 가족들에게 마음의 평안함과 혹시나 하는 환자의 회복 가능성 소망도 품게 만들어준다. 병원이나 호스피스에 있는 대부분 말기 임종 환자들은 마약성 진통제와 강력한 진정제로 죽음의 침상에서 죽은 듯 누워있다. 말기 선명성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희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사는 임종 환자를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의사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신념으로 말기 임종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의료 윤리에 어긋난다. 개인감정이 아닌 객관적 관점에서 무엇이 환자를 위한 책임 있는 도움인지를 결정해야 된다. 그중의 하나가 말기 선명성 발생 가능성의 문제다. 얼마나 강한 진통제로 환자를 진정시켜야 될까? 통증과 말기 선명성 발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의사의 직업이 그래서 어려운 모양이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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