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우리의 설

2024-02-26 (월) 박치우/남성복식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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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0일, 음력의 정월 초하루 큰 명절을 쇠어 보냈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자기네의 정통 그들 나름의 좀 다른 생활문화가 있는 것을 보면 흥미롭다. 왜 우리는 일월을 정월(正月), 초하루를 설이라 부르며 딴나라 사람들의 양력 1월1일보다 더 많이 지내고 있을까. 양력 1월1일 해피 뉴이어의 신년 감회보다 좀 다른 감회를 느낀다.

1890년대 고종때부터 양력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음력은 태양을 현미경으로 기후관찰 하기보다 달을 육안으로도 관찰, 기후변화를 파악함으로서 농사를 짓게되었다.
제삿날, 생일날, 명절날 모두 음력으로 기록한 우리 조상은 무엇이나 첫 선(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고, 첫아들을 장자(長子), 일년 열두 달 중 첫 달을 정월(正月), 그래서 명절 중에 1월 1일을 정월 초하루로 부르며 일년 중 제일 큰 명절로 생각했다.

그런데 왜 ‘설’ 이라고 불렀을까, 도대체 설이 무슨 뜻인가, 지금도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전통문화는 학술로 전해지지 않더라도 생활양식이 문화를 따른 것으로 자연 익혀지는 것도 많다. 지금 우리가 전통문화에 어두운 까닭은 무엇보다 그것은 조선 후기 1900년대 고종 때부터 나라 이름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으나 이어 36년간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우리의 우월했던 생활문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의식주(依食住)문화에 대해서는 학술적이 아니더라도 잘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빈부의 차가 심하여 일반 서민은 옷도 흰색 면으로 만든 것을 입었다.
백의민족으로 민족성처럼 표현했지만 사실은 염료도 흔치 않았고 염색술도 부족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류층 왕족이나 부자 양반들은 예쁜 색으로 물들여 만든 비단 옷을 입었다.

한국 지도를 보면 예쁜 토끼 한 마리 누운 모양의 국토의 총면적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만 하다. 8도강산은 험준하여 왕래하기 어려워 팔도마다 다른 사투리가 심해서 어떤 말은 못 알아들었다.

음식도 지역에 따라 많이 달랐다. 특히 생선류는 바닷가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은 일반 서민은 부자라도 99칸, 100칸을 넘으면 위법이었다.
상류층만 기와집의 사랑채도 있는 큰집에 살았고 일반 서민은 안방 그리고 건넌방 방 두개 가 있는 초가집에 살았다.

본인은 지금 미국에 살지만 태생은 옛 백제 온조 왕릉이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진학때문에 서울에 있는 집에 와 살았던 시절의 설 이야기를 쓰고 싶다.

섣달은 이르게는 초순부터 정월 초하루 설날 큰 명절을 설레면서 준비했었다. 할머니,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설빔을 손으로 직접 지었는데 딸들에게는 색동저고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들은 무늬 있는 명주(明紬) 조끼에 옷고름 없는 구슬단추가 달린 마고자까지 솜을 얕게 두어 지었다.

아낙네들은 소매 끝에 남색으로 남편 사랑을, 자주색 옷고름은 자식 사랑을 상징했다.
설빔이 끝나면 대명절 음식을 만드는데 밤새 불린 녹두를 맷돌에 갈아 녹두전을 부치고 한살을 또 먹는다는 뜻으로 떡국떡을 준비했다. 떡 치는 소리가 이 집 저 집에서 요란히 들려 명절 분위기를 더욱 나게 했었다.

초하룻날 길거리는 세배꾼들이 설빔 차림으로 희희낙락하는 풍경이 마치 그날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화려하게 흥청대었다. 이 풍성한 분위기는 정월 대보름 15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많은 하층민들이 평생 명주옷 한 번 못 입고 흰 무명옷만 입고 살았다.

특히 정월 초하루는 일반 서민들은 정월 대명절이 닥쳐오는 것이 가난을 더욱 느끼게 해 서러워서, 그래서 정월 초하루 서러운 설날, 그날을 챙겨야 하는 달 12월이 섣(설달)달이라고 부르며 전해져 내려 온 것은 아닐런지.

<박치우/남성복식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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