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빳빳한 시어머니

2024-02-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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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정/주부

시어머니 얘기를 할까 해요.17년전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 날 남편과 시댁에 결혼승낙을 받으러 처음으로 인사를 갔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시어머니와의 첫만남이 정말 별로였거든요. 지금은 죄송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오해로 결혼을 할까 말까 망설이기까지 했네요. 아니 글쎄, 어머니께서 저에게 눈길하나 마주치지 않으시고 고개를 숙이신 채 조용히 사과만 깎으시는 거예요? 속으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예단비를 더 드려야 하나? 정적 속에서 별의 별생각이 돌려 깎여져 나오는 사과껍질처럼 길고 또 길게 이어져 무척 불편했어요.
우여곡절 끝에(아니,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 좋아 미쳐서) 남편과 결혼하고 첫 명절 날이 되었어요. 부엌에서 어머니와 함께 제사음식 준비를 하며 이것 저것 뭘 할지 애교가 대박 섞인 목소리로 여쭤 보았는데 그때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시고 대답만 하시길래 답답했던 저는 어머니를 부여잡고 “어머니 예쁜 며느리 문정이 좀 봐주세요!”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어머니를 빤히 처다 봤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한쪽 눈, 검은 동자 위에 하얀 큰 점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분명히 이상해 보여 왜 그런지 여쭤 봤더니 어릴 적 열병으로 눈이 이렇게 됐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 하시더라구요. 그제서야 어머니가 여테까지 왜 눈을 마주치지 않으셨는지 고개를 숙이고 다니셨는지 이해가 되어 그동안 오해했던 것이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명절이 끝나고 저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모 안과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지금이라도 한쪽 시력을 회복하실 수 있는지 의사에게 여쭤 봤어요. 시력은 회복이 안되지만 검은 눈동자위 하얀 점을 시약으로 검게 칠하는 시술을 하면 정상 눈처럼 보여 생활에 지장이 없다 하길래 바로 시술을 진행했어요.
시술 후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시며 미소를 띄우시는 어머니 뒤에서 “어머니 이제 빳빳하게 고개 들고 신나게 사세요, 어머니 눈이 무척 예쁜 것 아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이제 춤도 추러 갈 거야!”하시며 고향 대구로 돌아 가셨어요.
16년이 지난 지금, 시어머니는 동네 문화센터의 아쿠아로빅 회원단장으로 물속에서 빳빳하게 고개 들고 춤추며 살고 계세요. 저는 아들과 매년 한국 방문 때마다 시댁에서 지내는데, 어머니께서는 저를 늘 공주로 대접해 주세요. 함께 춤도 추시기도 하고요. 빳빳하게 고개 들고 저의 눈을 마주 보시면서요.
딸이 없는 어머니와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친정 엄마가 없는 저는 모녀가 되어 있어요. 오래전 인기 TV프로그램인‘미녀들의 수다’에 나온, 외국며느리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시어머니 처럼요. 크리스티나의 음성을 빌려 어머니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 평생 빳빳한 시어머니가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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