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링에서 꿈꾸는 아메리칸드림… 그들은 왜 레슬링을 떠나지 못할까

2024-01-26 (금) 라제기 영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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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레슬러’

링에서 꿈꾸는 아메리칸드림… 그들은 왜 레슬링을 떠나지 못할까

비주류 레슬링 단체 선수들의 삶은 어떨까.‘레슬러’는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 기반을 둔 OVW를 통해 레슬링 선수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미국 사회를 조망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제공]

외양은 화려하다. 이름부터가 남다르다. ‘캐시 플로’나 ‘펙터큘러’ ‘할리후드 해일리 제이’ 등으로 스스로를 칭한다. 커다란 몸집에 울퉁불퉁한 근육을 지녔다. 이들은 관객의 환호를 먹고산다. 링 상단에서 날듯이 뛰어내리거나 상대의 공격에 치명타를 입은 듯 쓰러진다. 위험천만한 동작일수록 갈채가 쏟아진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사는 삶. 그들은 링 밖에서도 번쩍이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다큐멘터리 ‘레슬러’는 프로레슬러 세계를 들여다본다. 미국 유명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 소속 선수들은 아니다. 켄터키주 루이빌에 기반을 둔 OVW 관계자와 선수들, 주변인들의 사연이 화면을 채운다. OVW의 인지도는 WWE에 비교할 수 없다. 신생 AEW보다 한참 아래 단체로 여겨진다. 명칭부터 한계가 있어 보인다. OVW는 ‘오하이오 밸리 레슬링(Ohio Valley Wrestling)’의 약자다. WWE보다 못한 단체라고 하나 자부심은 있다. 할리우드 스타로까지 성장한 존 시나와 데이브 바티스타 같은 유명 레슬러들을 대거 배출했다. OVW의 홍보 문구가 ‘오늘, 내일의 스타가!’인 이유다.

OVW는 가난하다. 선수들도 빈곤에 시달린다. 레슬링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한때 WWE 링을 휘저었던 유명 선수 출신 알 스노우가 OVW를 운영한다. 그는 경영에는 서툴다.


파산 직전 OVW에 구원자가 나타난다. 루이빌 시장과 야심만만한 지역 사업가 맷 존스다. 존스는 새 도약대가 필요하다며 이리저리 간섭을 한다. 스노우는 내색을 않고, 선수들은 못마땅하다. 존스는 살아남기 위해 새 사업을 기획한다. 늦은 여름을 장식한 큰 무대를 준비한다. 기존 구성원들과 존스 사이 냉기가 형성된다.

다큐멘터리는 OVW 안팎을 살핀다. OVW의 과거 영화와 현재 처한 상황을 멀리서 보듯 조망하기도 하며, 선수들의 세세한 사연들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선수들 대부분은 굴곡진 과거를 거쳐왔다. 할리후드 해일리 제이는 어머니와 함께 링에 오른다. 그의 어머니는 마약을 팔아 자식들을 키웠다. 변변치 않은 학력에 배운 기술이 없는 싱글 맘으로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직업’이었다. 그에게 새 날을 열어준 건 우연히 입문한 레슬링이다.

선수 대부분은 아메리칸드림을 도모한다. 인도에서 온 마하발리 쉐라는 미국에서의 성공을 위해 도인처럼 생활하며 경기에 임한다. OVW는 단체 홍보를 위해 켄터키 여러 지역을 주말마다 돌아다니며 경기를 펼친다. 유랑극단이 따로 없다. 그들이 찾은 지역의 관객들의 형편도 선수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치과 치료를 제대로 못 받은 듯 치아가 듬성듬성 있다. OVW는 미국 사회, 특히 남부의 축소판이다.

OVW 선수들은 돈 때문에만 링에 오르지 않는다. 언젠가 이루어질지 모를 꿈이 링 위에 있어서다. 꿈을 성취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기쁨이 적지 않다. 현실에서 쌓인 분노와 슬픔, 울분을 토해낼 수 있는 점도 이들을 링에 오르게 한다. 링이란 무대는 그들에게 삶의 터전이면서도 ‘해우소’인 셈이다. ‘레슬러’는 사회 아래쪽에 위치한 사람들의 사연을 레슬링을 렌즈 삼아 들여다보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해괴한 복장으로 험한 경기를 치를 뿐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라제기 영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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