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달러 벅스와 전설따라 삼천리

2024-01-13 (토) 이영묵 / 문인
크게 작게
1년전 수표를 썼을 때 2022년이라고 써서 2023년으로 고치고 이니셜 싸인한 것이 바로 어제 같았다. 오늘은 2024년인데 2023년으로 수표를 써서 다시 고치며 혼자 “아 참 세월이 빨리 가는구나”하는 날이었다.

근래 신문에서 백악관 근처의 록 크릭 공원에 사슴이 넘쳐나서 가정집에까지 나타난다며 그 숫자를 줄이기 위하여 사슴사냥을 허가한다는 기사를 읽고 문득 나의 공상의 세계는 200년 전쯤으로 돌아간다.

‘OK 목장의 결투’, ‘셰인’ 같은 서부 활극영화를 보면 카우보이들이 권총을 차고 위풍당당하게 커다란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린다. 하지만 실제 카우보이들은 조랑말을 타고 소떼를 몰며 소들을 늑대 같은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카우보이들이 일 끝나고 지친 몸으로 갈 곳은 주막이었다. 가난한 그들에게 돈이 있었겠나? 권총 차는 허리 혁대에서 총알 하나를 빼서 주막집 주인에게 주면 작은 컵에 술을 부어주었다. 그 술잔을 그래서 샷(총알 shot)이라고 불렀다.


이 때 사냥꾼이 거들먹거리며 나타난다. 목도리(?)를 하고 말이다. 그 목도리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사슴가죽(Buck)이었다. 주막 주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술을 병째로 내놓는다. 그 시절에는 어설픈 종이돈(Dollar)보다는 사슴가죽(buck)이 더 인기였지 싶다. 오늘 날 five dollar, ten dollar라고 하지 않고 five bucks, ten bucks라고 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바로 그 사슴가죽 buck이다.

200년 전 과거로의 여행은 이번에는 조선으로 날아간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KBS 드라마인 고려 거란의 전쟁이 대단한 인기이고 강감찬 장군 이야기가 상종가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에서 임금 광종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가면서 지방 호족들의 횡포를 보고 전쟁 후 이 횡포를 타파하고자 과거제도를 도입한다. 그 후 무신시대, 몽고 침입, 원나라 간섭을 지나 조선은 개국공신과 유림들과 권력 다툼, 사색당파 싸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아무래도 과거다운 과거는 바로 200년 전이 아니었나 싶다.

유식한 양반이야 삼국지,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것을 읽었겠지만 서민들이야 과거 보러가는 한양 길에 주막에 들러 수절과부와 로맨스, 또는 불륜과 치정이야기, 처녀귀신 복수 이야기, 노상강도 이야기 등등의 이야기의 꽃을 피었을 것이다.

할머니 무르팍을 베개 삼아서 들어본 200년 전 조선 옛날이야기, 그리고 사슴가죽 한 장으로 술 한 병 마시는 미국 서부이야기. 빠르게 흐르는 세월의 정초에 빌어먹을 정치이야기를 떠나 공원에 넘쳐나는 사슴 기사로 시작된 공상으로 미소 짓게 하는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이영묵 / 문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