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던 연말이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시작되었다. 너무 바쁜 일정 가운데 살아가는 나는 그저 매일매일 주어진 만남에 마음을 다해 섬기다 보면 한 달이 지나가는지 한 해가 지나가는지 시간이 금방 지나가 달력을 넘길 때마다 그저 놀랄 뿐이다. 너무 시간이 빠르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몇 번 흔들다 보면 새로운 달력을 걸어야 하는 새해가 무작정 시작된다.
1년이란 시간이 그저 달력만 넘기다가 지나간다는 게 너무 아쉬워 시간을 관리하기 위해 스케줄을 열심히 짜고 점검하며 살아가 보지만 마치 내가 시간에 매달려 허둥지둥 굴러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 새해는 처음으로 다른 마음으로 시작해 본다.
늘 어딘가에서 받아온 달력이 아닌 의미 있는 달력을 걸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딸이 작년 한 해 동안 직장 일을 하면서 언제 그림을 그렸는지 계절마다의 색깔과 무늬로 가득 채운 새해 달력을 만들었다.
그 달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작년 한 해가 이렇게도 다양하고 아름다웠나? 한 해 동안 나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모양들과 색깔들을, 딸은 이렇게나 아름답게 보았을까? 계절을 가득 채웠던 많은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두 장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좋은 글과 그림을 골라 편집해서 인쇄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달력에 적힌 숫자는 그저 날짜일 뿐이었는데, 딸이 그린 그 달력 안에 담긴 날짜들은 마치 나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느껴졌다.
허둥지둥 시간에 매달려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는 그 공간의 색깔이 느껴지고 자기 삶에 주어진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채워가며 다음 한 해를 준비하고 있었구나…
매일 시간을 탓하며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는, 자신을 표현하며 자기만의 삶을 한 장 한 장 만들어가고 있었구나…
이렇게 준비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삶으로 채운 달력을 자신 있게 벽에 걸며 그다음 장을 또 채우기 시작하겠구나…
새해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를 다시 다짐하고 시작하지만, 익숙한 붓과 늘 사용하던 색깔만을 가지고 그리다 말기를 반복하며 결국엔, 삶을 채운 달력을 한 번도 완성하지 못한 채 다른 이의 달력을 걸고 넘기면서 ‘그냥 그렇게’ 시간을 채우며 보내고 싶지 않다.
2024년도의 계획을 바꿔본다.
다른 이가 채워놓은 삶의 달력에 매달려 살아가지 않으련다.
들어야 할 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 깨닫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며, 맘껏 느끼고 누리며 나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한달 한달을 시간이 아닌 삶으로 차곡차곡 채워보련다.
2025년도에 걸릴 달력은 아마도 내 삶이 가득담긴 묵직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