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울지마!” “그럼 너는 왜 울어?” “나는 아프니까 울지.”
용하다는 말은 엄마의 지푸라기가 되었다. 하얀 모시저고리에 날아갈 듯한 깡통치마를 입은 엄마는 딸을 업고 침을 잘 놓는다는 어르신을 찾아 갔다.
징게골이란 곳은 커서 보니 한 시간 반쯤 거리였고 그 때는 걷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흰색 바탕에 회색 잠자리가 가득한 치마는 엄마를 금방이라도 파란 하늘로 날아올릴듯 했지만 엄마는 날아갈 수 없었다. 두돌이 되기 전에 소아마비로 전신마비가 된 딸은 젊고 고왔던 엄마에게 우주만큼 무거웠을 터.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세살 박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영민하다고 엄마는 자랑을 했을 거고 그것을 반복해 들은 탓에 그 날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일은 아마도 엄마가 처음 받아본 위로로, 어쩌면 사람노릇 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영민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쑤시개만한 대침도 엄마의 하얀 모시 저고리와 하늘하늘한 깡통 치마, 그 집 사랑마루, 마당, 동네 이름, 그리고 침장이 할아버지의 하얀 수염 모두 기억나는 걸 보면.
고등학생이 된 딸이 지팡이를 짚고 모두에게는 평범한 일상을 휘청 휘청 따라가고 있을 때 가족이 모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추운 겨울에 엄마는 새벽기도를 다녀와서 나에게 찬 손을 얹고 기도를 하셨다. 어쩌면 부모님의 신심은 나 때문에 더 빨리 깊어진 것일 수도 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석달 만에 아버지는 하루 두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고 부모님은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딸에게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성으로 기적을 실현시키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좋은 걸 모르겠다.’ 표현하는 엄마에 비해 나의 장애에 일절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까지 항상 내 발을 주무르셨다.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는지 말하지 않으셨지만, 왜 모르겠는가 그 바램을. 그러니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을 부모님은 얼마나 사모하셨을까?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쉬임을 얻으셨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운을 뗀다면 힘들다. 힘들고 불편하다. 불편하지만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조금은 다른 삶의 얘기를 할 거 같다. 예를 들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당하다”는 말을 들을 때, 장애가 부끄러운 것인가? 주눅들어야 할 일인가? “엄마 울지마”를 수 없이 반복하며 그럼에도 엄마를 남몰래 많이 울렸을 그저 그런 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