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팬데믹이 일깨운 아시안 정체성

2023-11-28 (화) 정재욱
작게 크게

▶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팬데믹이 일깨운 아시안 정체성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화요일 교육섹션에 정재욱 씨의 글을 연재한다. 소소하지만 공감이 가는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경험들을 독자들과 나눈다. 이 글 시리즈의 현판 ‘워싱턴 촌뜨기’는 미국의 수도에 살고는 있으나 여전히 낯설기만 한 ‘촌뜨기 신세’라는 작가의 뜻에 따라 붙였다. <편집자 주>

LA 폭동이 난 해 늦가을에 이곳에 왔다. 사이구(429)로 불리던 이 참극은 이 미국 땅에서 사는 코리안,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을 던졌다. 못 살던 고향을 떠나와서 경제적 안정 하나만을 바라고 앞으로만 달려오던, 그래서 어느 정도 자수성가했노라 자기 만족에 빠져있던 대량 이민세대에게 던져준 충격이 자못 컸다. 그래서 한인사회는 사이구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역사는 말할 것이다. 

1992년의 사이구가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사건이었다면 2020년부터 두 해 넘게 계속된 코로나 팬데믹은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그 정체성의 외연을 확장하게 만든, 현재진행형의 사태라고 하겠다. 


차이니즈 바이러스, 쿵 플루(Kung Flu) 그런 유행어로 팬데믹의 책임을 넘기려는 수작이 등장할 때만 해도 나와는 다른 저들의 문제로만 여겼다. 평소 차이니즈 소리 듣는 걸 그리도 싫어했던 터라 남의 집 불구경인 양 했다. 

그런데 그 불은 곧바로 아시안 전체에게 붙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똥이 아니라 온몸을 향해 쏟아지는 불화살이었다. 2021년 여덟 사람이 목숨을 잃은 애틀란타 스파 총기난사는 차이니즈 혐오가 아시안 전체를 향한 것임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팬데믹이 어느 정도 소강에 들어간 이후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아시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2세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 흐름에서 쓰여진 책 두 권을 소개하고 싶다. 

첫번째는 십대 독자 대상의 YA 소설이다. ‘You Are Here: Connecting Flight’(Allida, 2023). 
폭설로 발이 묶인 시카고의 국제공항에서 아시안 청소년들이 겪는 편견과 무지와 혼란과 도피와 도전이 서로 엮어지는 스토리다. 몹시 재미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라고 내용 소개는 건너뛴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 숫자만큼이나 많은 12명의 아시안 아메리칸 2세 작가들이 협업해서 쓴 옴니버스식 소설이다. 고려의 도공 소재로 뉴베리 금메달을 받아 잘 알려진 린다 수 박을 비롯해서 한인계 작가로 마이크 정, 엘렌 오, 한국에서 입양 온 메레디스 아일랜드, 일본계 트레이시 치, 베트남계 1세 민 리, 대만계 그레이스 린, 중국계 SF작가 마이크 첸과 수잔 탄, 필리핀계 에린 엔트라다 켈리와 랜디 리베이, 타일랜드계 크리스티나 순톤밧이 이 릴레이 소설의 작가들이다. 

각자의 뿌리 위에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정체성을 찾아가자는 시도로 이들 작가들을 묶은 편집자는 이곳 메릴랜드에 사는 변호사 출신의 작가 엘렌 오(Ellen Oh). 한글 번역판까지 나온 아동소설 ‘김주니를 찾아서(Finding Junie Kim)’를 재미있게 읽었던 즐거운 기억에 작가의 다음 책을 찾다가 이 소설을 읽게 됐다. 엘렌 오는 비영리 다문화 도서 운동 단체를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책은 다소 교과서 느낌인데 이 역시 몰입하여 마쳤다. ‘Asian American History of the United States’(Beacon Press, 2022). 
아무래도 한인언론사에서 일했던 까닭에 중국인배제법이니 1924년의 이민 쿼터, 1965년 개정이민법 등에 관해서는 남들보다 많이 아는 편이다. 미국내 아시안 이민사에 관한 기존의 책들도 있었고. 그럼에도 단연 으뜸으로 꼽고 싶다. 

유명해서, 추천으로 알게 된 책은 아니다. 천명관의 ‘고래’ 영역판 오디오북을 듣고 좋아서 그 나레이터가 읽은 다른 책들을 찾아보는 중에 알게 됐다. 저자의 성이 ‘최’씨여서 더 끌린 것도 있겠다. 


버클리대의 인종문제 전공 교수인 저자 캐서린 세니자 초이(Catherine Ceniza Choy)는, 읽다 보니, 필리핀계 이민자의 후손이다. 역시 버클리대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남편 그레그 최의 성을 따랐다. 

책을 쓰게 된 계기로 이번 팬데믹으로 불거진 아시안 혐오를 명시한다. 아시안 이민사의 흐름에 박혀 있는 지긋지긋하고 같잖은 저들의 배타주의를 다시 들여다 본다. 
아시안이 차이니즈 혹은 재패니즈 하나로 퉁쳐지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나라 출신들을 고르게 다루며 보여주는데 아무래도 저자의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그게 내게는 재미를 더한 포인트였다. 

필리핀 사람들을 더 알게 되었다. 숫자로 보면 많다는데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필리피노들이었다. 팬데믹 희생자 그룹에 빠질 수 없는 필리핀 간호사들로 풀어가는데 이건 저자의 앞선 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이슈다. 한국의 파독 간호원들이 겹쳐 보인다. 

무엇보다 한인 이민사, 그중에서도 독립운동 관련사가 비중있게 다뤄져 있다.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이 중심이다. 이는 저자의 시월드가 거기에서 출발한 인연이다. 다른 아시안들이 읽으면 질투가 좀 나겠다 싶게 자세히 소개한다.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시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 같이 한번 읽고 공부해 보자. 두 책 모두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없다면 주문 압력 넣으시고.

<정재욱>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