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열흘 동안 스페인 남부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스페인은 8년 전인 2015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마드리드를 거친 다음 북상해 리오하 와인산지와 빌바오 등 북부지역을 방문했었다. 당시 산티아고 순례길도 몇 구간 지나면서 묵묵히 걷거나 자전거를 끌며 가는 순례자들을 만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주변 풍광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내년 봄 본보 주최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에 동참하는 분들은 그 여유로운 사색과 성찰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은 남부와 북부가 전혀 다른 나라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에 그때 남부지방을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안달루시아(Andalusia)로 통칭되는 남부 지역은 8세기 초 아랍무슬림의 침공을 받아 15세기까지 거의 700년 동안 이슬람 통치를 받았던 탓에 그 문화와 예술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 세비야의 알카사르 궁,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대성당 등이 그런 유산을 간직한 대표적 명소들로 꼽힌다.
하지만 이번 안달루시아 여행은 그런 관광지 위주의 방문과는 사뭇 다른 여정이었다. 우선 자동차를 렌트해 직접 운전하고 다니면서 보석처럼 숨어있는 소도시들을 많이 찾았고, 골목골목 사람들 사는 동네를 들여다본 것이 인상 깊었다. 관광객 북적이는 유적지보다 한적한 소도시의 카페와 식당, 오래된 교회와 마켓에서 시간을 보내며 일정에 쫓기지 않는 여행을 즐겼다.
생판 낯선 곳에서 그렇게 한갓진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창한 스패니시를 구사하는 ‘보헤미안’ 친구 줄리 덕분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사람 좋아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줄리는 스페인 남부를 돈 것만 벌써 5번째, 그저 졸졸 따라다니기만 해도 되는 여행이었다.
첫 도착지와 마지막 도시만을 정해놓고(비행 스케줄 때문에) 나머지 일정은 “내일은 어디로 갈까?”하고 바로 다음날 묵을 숙소를 예약하면서 돌아다녔다. 비시즌이어서 가능한 일정이었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안달루시아는 첩첩 산이 많은 지역, 산꼭대기까지 올리브나무와 호두나무, 오렌지와 레몬, 망고 트리가 심겨있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운전하다보면 산 정상이나 중턱마다 점점이 흰 집들이 수백호씩 모여 있는 ‘하얀 마을’(pueblos blancos)들을 만나게 된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 때문에 벽을 하얗게 칠했다는데, 접근이 쉽지 않은 고산지대에 마을들이 형성된 이유는 아마도 오래전 무어인들의 침략을 피해 계속 올라가면서 정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지금은 이런 곳의 상당수가 관광객들이 찾는 예쁜 마을로 변신했다. 오르락내리락 골목마다 붉은 지붕과 하얀 벽, 담벼락에 걸린 꽃 화분들이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마을들이다.
그라나다, 몬테프리오, 빌라누에바, 프리힐리아니, 네르하, 안티케라, 론다, 산루카, 세빌을 돌았다. 그리고 스페인의 땅끝 도시 타리파에서 이틀 머물면서 바다 건너 모로코 탠지어(탕헤르)에도 다녀왔다. 유럽의 최남단인 타리파 해변에 서면 북아프리카 대륙이 바로 코앞에 보인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의 거리가 불과 14km, 신화에 따르면 두 대륙은 붙어있었는데 헤라클레스가 지나가려고 맨손으로 두 땅을 벌려놓았단다. 배를 타면 1시간도 안 걸려 탠지어에 도착한다. 배 안에서 입출국 수속을 거쳐야해서 번거롭지만 그래도 하루 모로코 시내를 거닐며 아프리카 땅을 밟고 왔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유럽이 모두 그렇듯 스페인에서의 운전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대도시는 도로가 너무 좁고 복잡한데다 파킹이 힘들어서 아예 세워놓고 걸어다녔다. 숙소를 시내 중심에 잡고 거의 모든 곳을 걸어서 다녔다. 하루 1만보는 우스울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니 많이 먹었다고 살찔 염려는 할 필요도 없었고 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줄리가 “우리 LA에서 뭔가 잘못 살고 있는거 아냐?”라고 물었다. 그때 처음으로 LA의 풍경을 떠올렸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여도 차를 타고 다니는 뚱뚱한 사람들, 물가는 비싸고 홈리스는 늘어나고 자나깨나 범죄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곳. 총격사건이 매일 터지고 사람들은 하루하루 일상에 지쳐 더 이상 웃지 않는다. 큰집에 사는 사람도, 럭서리 차를 타는 사람도, 명품 패션으로 치장한 사람도, 행복한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많이 웃었다. 뚱뚱한 사람은 없고, 물가는 비현실적으로 쌌다. 진한 커피 한잔에 1.50유로, 맛있는 와인 한잔에 5유로, 음식은 타파스 한 접시에 10유로도 안 됐다. 팁을 놓지 않아도 되고 조금만 주어도 고마워하는 나라, 어디가나 커피와 와인이 너무 싸고 맛있어서 매일이 즐거웠다.
타리파의 한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은 네덜란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IT 종사자인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곳에서 몇 달 혹은 몇 년씩 살고 있는데 아프리카가 가장 좋다고 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는데도 제일 많이 웃고 행복해 한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나미비아가 가장 아름답고 자유로워서 그곳에 정착할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러자 지난 20년간 중미 니카라과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줄리 역시 그곳 사람들의 무공해 미소를 이야기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캘리포니아 사람들보다 더 많이 웃는다며 우리는 많이 갖고도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포르투갈로 넘어가 여행을 계속하는 줄리와 헤어져 혼자 LA로 돌아오면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우리는, ‘세계최고의 나라’ 미국에서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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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