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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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운산장기

2023-10-07 (토) 조광렬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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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운산장(月雲山莊)’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나의 집에 붙인 이름으로 아래의 한시에서 비롯되었다.

“산새가 숲 근처서 우는 소리 듣는데/새로 지은 초가 정자는 실개울을 내려 보네/홀로 술 마시며 그저 밝은 달 짝을 삼아/한 칸 집에서 흰 구름과 더불어 산다네” [회재 이언적(1491~1553)의 한시 ‘계정(溪亭)’]

집이란 물건은 대궐 같은 집이든지 작은 초막이든지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돌아다닐 수 없는 것임에 집 이름도 특칭의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월운산장’은 특정한 장소, 일정한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여섯척 몸을 담아서 내가 그 안에서 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모두 ‘월운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산장이라 했으나 둘레에 산이 없는 곳이고 보니 ‘월운산장’은 깊은 산에 있거나 대도시 안에 있거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은 산장이다.


나는 달과 구름을 사랑한다. 달은 태양과 달리 뜨겁지 않고 은은하고 부드러워 좋다. 희미한 낮달은 흡사 존재감 없는 내 신세 같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보름달은 그리움을 데려와주어 고맙다.

그런가 하면 구름은 흘러다니며 나의 눈에 위안을 주어 좋다. 인간의 영혼이 유한과 영원 사이에서 망설이며 방황하듯이 구름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방황하며 떠돌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내외는 지난 2019년 1월에 맨해튼 이스트 리버 강변의 코압 20층에 있는 원 베드룸으로 생애 마지막 이사를 왔다. 58년 된 아파트여서 내부가 구식이고 낡았는데 클로징 후 다 걷어내고 패션디자이너인 막내아들 내외가 인테리어 전체를 흰색 톤으로 바꾸어 현대식으로 리모델링 해주었다.

명색이 건축가인 나를 감동시킨 것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작업공간이 필요한 나를 배려해 책장, 탁상용 이젤과 컴퓨터를 놓을 수 있는 책상 및 서랍들을 흰색 미닫이가 달린 붙박이 장속에 모두 숨겨놓아 평소에는 서재가 없는 듯 연출한 유니크한 발상이었다. 집이 더 넓어 보이고 깨끗해서 좋다. 이를 위해 다른 자식들도 십시일반 비용을 보탰단다. 내 주거공간이 단숨에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마천루숲 속에서 사는 뉴요커들은 집에서 자연과 햇볕을 즐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집은 주변에 6층짜리 아파트가 대부분이어서 뷰가 시원하고 동남향의 코너에 위치해서 하루 종일 볕이 들어 마음을 밝게 해준다.

가끔씩 눈 아래로 노니는 구름을 볼 수 있는 것이 색다른 즐거움이요, 모든 방 심지어 주방에서도 흐르는 강물과 오가는 온갖 종류의 배들과 BMW(브루클린, 맨해튼, 윌리엄스버그) 세 개의 다리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야경도 멋지거니와 하루도 똑같은 적이 없는 일출 직전의 황홀한 아침노을과 강 건너 빌딩위로 눈부시게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 저녁 일몰의 노을 진 꽃구름을 매일 번갈아 바라보는 이 즐거움!


다산 정약용은 ‘인생의 3락’ 중의 하나로 “곤궁했을 때 지나온 곳을 성공하여 찾는 것”을 꼽았다. 1971년 내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직후, 아침에는 차이나타운 닭 공장에서 닭 모가지도 따고, 저녁엔 핍스 애비뉴의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 버스보이를 하던 유학시절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오십년 후 이렇게 맨해튼에 거주하며 곤궁했던 시절에 일하던 곳을 찾아가보고 그 특급식당에 가서 음식을 서브 받고 후한 팁을 주고 나오는 그 ‘락(樂)’을 맛보았으니 나는 그 ‘인생삼락’을 어느 정도 누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단 한 가지, “이곳에서 때가되면 깨끗하게 죽게 도와주소서.” 두 손 모으는 깊어가는 ‘월운산장’의 달 밝은 가을밤이다.

<조광렬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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