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말기 대한제국 시절이었던 1902년 12월22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미국 상선 갤릭호는 102명의 한국인들을 태우고 일본 고베항을 거쳐 계묘년 새해가 밝았던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미주 한인이민사의 시발점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견뎌낸 한인들 중 일부는 하와이에 남았고 어떤 한인들은 새 삶을 찾아 LA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60년의 세월이 두번 지나 다시 계묘년인 2023년. 두차례에 걸친 이민국 검사 과정에서 끝내 입국이 거부된 몇몇 한국인들을 제외하고 86명으로 시작했던 한인 이민자 수가 195만명으로 크게 늘어 났다. 한국 외교부 추산으로는 263만명이 미국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아간다.
한국일보 미주본사는 별빛조차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전진해 이룩한 자랑스러운 이민사를 기리기 위해 ‘이민사 120년 미주 한인사회를 빛낸 영웅들’을 최종 선정했다. 올해 선정된 이민사 영웅들은 ▲미셸 박 스틸(68) 연방 하원의원 ▲영 김(61) 연방 하원의원 ▲존 이(53) 12지구 LA 시의원 ▲루시 고(55) 연방 제9항소법원 판사 ▲도미니크 최(52) LAPD 수석부국장 ▲고석화(78) 뱅크오브호프 명예회장 ▲김태연(76) TYK그룹 회장 ▲박형만(85) 만희코주재단 이사장 ▲남진우(63) 태평양 요트횡단 원정대장 ▲김명준(82) 산악인 등 10명이다.
미주 한국일보가 이민사 영웅들을 선정하기는 이민 100주년이었던 2003년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당시 한국일보는 고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고 새미 리 박사, 고 김영옥 예비역 육군대령, 고 이경원 원로 언론인, 고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태미 정 류 판사, 소피아 최 CNN 앵커, 박찬호 전 LA 다저스 선수, 홍명보 전 월드컵 국가대표 축구선수 등 9인을 ‘한인 이민사 100년의 영웅들’로 선정한 바 있다.
이들 영웅들은 그해 1월1일 로즈 퍼레이드 꽃차에 탑승, 이민 100주년을 맞은 한인사회의 위상을 주류 사회에 과시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인사회의 긍지를 높인 인물들 사이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민사 100년 영웅들 중 고 문대양 대법원장, 고 새미 리 박사, 고 김영옥 대령은 초창기 이민 선조들의 후손이었고, 언론인 고 이경원씨와 고 신호범 주상원의원은 아직 한인 이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았던 1950년을 전후해 도미한 인물이었다. 반면 올해 선정된 이민사 120년 영웅들의 경우 미국 이민이 본격화된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 정착한 이민 1세와 1.5세, 2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0명의 한인 이민사 영웅들은 미주 한인사회 최대 잔치인 LA 한인축제의 하이라이트 행사로 오는 10월14일 토요일 오후3시 한인타운 중심가 올림픽가에서 화려하게 펼쳐질 ‘제50회 코리안 퍼레이드’에 초청돼 웅장한 행렬을 이끌며 이민 120주년의 의미와 성취를 만방에 알리게 된다. 이들 영웅들이 120년 전 이민 선조들을 태우고 하와이에 도착한 갤릭호의 형상을 본따 제작될 퍼레이드용 대형 차량을 타고 반세기 전 최초의 한인타운이었던 올림픽 길을 따라 행진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2차 대전 참전용사이자 미 육군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대대장을 역임했던 고 김영옥 대령은 20년 전 이민사 영웅 선정 축하 리셉션에서 “한때 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던 적이 있었다. 굿 코리안(Good Korean)이 굿 아메리칸(Good American)이란 해답을 얻게 되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고 말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킨 바 있다.
4인의 원정대를 이끌고 이민 선조들의 항로를 거꾸로 거슬러 태평양 요트횡단에 성공했던 남진우 대장은 “재외동포청이 공식 출범했던 지난 6월 인천광역시 주최로 열린 환영행사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내 뿌리는 결국 한국이라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감격을 전했다.
정든 고향 땅을 뒤로 하고 물설고 낯선 미국 땅에서 악착같이 버티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던 우리 모두는 이민사의 영웅들이다. 앞으로 이민 150주년, 200주년 행사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눈부시게 발전했을 미주 한인사회 전체가 이민사를 빛낸 영웅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노세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