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또 들어도 좋은 말 ‘겸손’ , 가훈으로 하는 집도 많이 있다. 남을 높이고 내 몸을 낮추는 태도, 서양 사회에서도 험불 (Humble), 같은 뜻으로 통한다. 그리고 겸손,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점점 오히려 남보다 우월해 보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지금 현대문명 산업시대에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의식주 문화는 모두 새롭고 부유한 것에만 가치관을 두어 과시욕이 만연하면서 옷차림도 나만의 달라 보이는 멋에 가치관을 두고있다.
이런 시대에 겸손함을 볼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불과 백여년 전 영국은 신사나라 그리고 영국사람들은 신사라고 했다.
그 당시 이미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을 치르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의식주 문화 선진국이었다.
그러하다 해도 영국신사는 들은 풍월일 뿐 실로 영국 신사들이 어떠했고 어떠한 차림을 했었는지 지금 이 시대까지에도 아니 당시 영국 사회에서도 복식에 대한 상식을 갖기가 쉽지 않았었다.
20세기 웰 드레스 맨으로 추앙되는 듀크 윈저공은 새로 맞추어 온 새 옷을 벽에 던져 헌 옷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입었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영국 복식문화의 한 면을 상상할 수 있다.
또 셰익스피어의 ‘햄릿’ 1막3장에 아버지 포로니어스가 아들 라티스에게 “옷은 지갑이 허락하는 한 값지되 너무 눈에 띄지 않는, 그리고 화려하지않고 부유해보이지 않게 한다. 의복은 종종 그 남자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영국신사 옷차림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바로 이해되는 것은 겸손해 보이는 차림은 새옷보다 헌 옷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남의 눈에 띄지않고 인간성이 느껴져야 하는 겸손의 뜻을 공감한다.
미국에서도 동부 명문 대학생을 둔 가정들의 가훈은 대부분 남에게 ‘겸손’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에 아들과 함께 메트로 노스 트레인을 타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에 내려 바로 근처에 있는 남성복 전문 백화점 부룩스 부러더스에 갔다. 겸손해 보이는 옷차림을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거기서 일하는 세일즈맨에게 장차의 자기 아들 옷차림을 부탁하고 돌아왔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정계에 진출한 아들들은 워싱턴 DC로, 경제계로 진출한 아들들은 뉴욕 월스트릿으로 갔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삶에 있어 인간성이 전부라면 전부이다. 끊어서는 안되는 것이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오래 지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알지만, 잘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인간성은 그 사람 마음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입은 옷에서는 보여진다. 그래서 옷을 잘못 입으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일찌기 복식문화 선진국을 이룩했는지, 이성시대로 불려지는 영국 1900년대 철학자 그리고 지성인들이 남긴 의복에 대한 명언을 지금도 찾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나만의 특이한 내 기준의 생각으로 꾸며진 옷차림에 대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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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남성복식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