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나효신/작곡가

2023-09-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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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프란시스코 이야기(5)

이사하기 위해 옷장, 책장, 서랍, 선반 다 비운 후에 벽에 걸린 액자들을 떼어내고 빈 벽 앞에 서면, 비로소 내가 살던 보금자리를 이제 곧 떠난다고 실감한다. 그 방에 걸린 액자들을 들여다보면 방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작곡가인 내 방에는 오선지와 필기도구로 어지러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작곡가 콜론 낸캐로우(Conlon Nancarrow, 1912년–1997년)의 사진이 걸려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가 가장 자주 방문하는 미술관은 두 곳 - 1966년에 문을 연 아시아박물관(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과 1935년에 문을 연 현대미술관(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시아박물관들 중 하나이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미국의 서부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라고 한다.

아시아박물관에 가면 이따금씩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지만, 주로 아주 오래된 동양의 시각예술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태평양 반대편에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고, 나의 조상들이 살았던 오래 전 그 시간에 동양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작품을 했는지... 배우고 영감을 받기도 한다.


현대미술관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작가들의 현대미술작품들을 보고 또 볼 수 있다. 나보다 조금 먼저 살았던 유명한 작가들, 나와 비슷한 연대의 작가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나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 이곳에서도 나는 종종 영감을 받곤 한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있는 팔각형의 방을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멋진 방이라고 여긴다. 그곳에는 애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년 – 2004년)의 작품 7점이 걸려 있다. 내가 그곳을 방문할 적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고요한 그곳에서 나는 마틴의 마치 줄만 그은 듯한 작품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다른 화가들이, 학자들이, 미술애호가들이, 그의 작품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오직 그 작품들 앞에서 내가 정화(淨化)된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래서 자꾸 간다,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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