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매실나무가 있다. 94년도에 이사 와서 맞대면했으니 얼추 30살은 됐겠다. 처음엔 매실나무인지도 몰랐다. 주목 울타리 뒤에 웬 회초리같은 나뭇가지가 옆집과의 경계선인 그물망 사이로 삐죽 나가있었으니까.
뿌리는 분명 우리 땅 쪽에 있는데 해바라기하느라 옆집으로 월경했나보았다. 아직 어려 낭창한 가지를 달래 그물망 안으로 데리고 와서 소속을 확실하게 인지시켰다. 다음해 봄 흰 꽃들을 피우기에 야생 꽃 사과나무인가 했었다.
어찌나 폭풍성장인지 주목 울타리 위로 솟구치며 세를 넓혔다. 봄이면 1번 타자로 개화해 대형 면사포를 뒤집어 쓴 듯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낙화시엔 또 어떤가. 완전 하얀 눈이 난분분 날리면서 온 마당을 흰 꽃잎싸락눈으로 덮곤 한다. 화무십일홍이라지만 이건 닷새도 못 견딘다. 그리곤 연두열매가 떨어지는데 맛이 영 요상 시큼해 하잘 것 없는 나무구나 했었다.
그랬다가 어느 해, 수퍼에서 파는 값비싼 청매실을 보고 우리 집 그 열매가 청매인 걸 비로소 알게 됐다. 내가 고국을 떠났던 83도년까진, 매실이 건강과 맛의 대명사로 등극해 붐이 일은 적이 없었다. 나도 매실나무와 매실의 실체를 접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집 매실나무의 가치를 안 다음부턴 매실 수확은 나의 연중행사가 됐다. 문제는 몸체가 거대해지다보니 윗가지들이 옆집으로 넘어갔고, 매실의 70%가 옆집으로 떨어진다는 거였다.
별 수 없이 옆집에 양해를 구하곤, 꼭두새벽에 옆집 잔디밭을 훑으며 매실을 주워왔다. 남의 눈이 의식돼 뒷꼭지가 당겼지만 말이다. 주목 밑으로 떨어진 우리 쪽 매실들은 엎드리듯 몸을 구부려 갈퀴로 요리조리 긁어모아야하는 중노동을 요했다.
맵찬 매실 수확 일과가 한 달 넘게 지속됐다. 육신의 고달픔 보다는 시간이 아까워 스스로 자신을 딱해하면서도 그랬다. 새, 다람쥐, 토끼들이 질리도록 먹게끔 내버려두면 될 걸, 매실이 눈에 띄면 아까운 마음에 그냥 지나치질 못해서다.
지인들 중에 매실청을 만들어 육류를 잴 때나, 나물 무침에, 깻잎장아찌에 넣으면 풍미가 살고, 매실주로 담그면 향미가 짙다는 매실 애호가들이 있다. 그분들께 매실을 돌리니 보람도 느껴지고, 나 역시도 친구 따라 담그게 된다.
몇 해 동안은 설탕과 매실의 비율상 문제였는지 국물이 별로 안 생겼다. 그러다 작년부터 동량의 비율에다 방부제 역할도 겸한다는 소주까지 좀 넣는 팁을 터득, 그럴싸한 매실엑기스가 된다.
마침 아들네가 7년 전 우리 동네로 이사 왔다. 그래서 봄이면 청매 싹이 올라온 주변의 흙을 걷어낸 다음 뿌리 좌우를 톱으로 잘라 아들집으로 입양시키곤 했다. 무려 3년의 시도 끝에 무사히 안착, 금년엔 매화나무 2세가 제법 꽃도 많이 피우고 매실도 간간히 낙하했단다.
딸도 3년 전에 우리 집 근처로 옮겨왔다. 나는 또 봄만 되면 딸네 집에 매실나무 공수작전을 펼치는데 아직은 글쎄다. 왜 그리 매실나무 입양에 매진하게 되는지 모르나, 그러고 싶다. 솔직한 내 심저(心底)엔 애들 집에도 뭔가 내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자리해서 아닐까! 먼 훗날, 애들이 매화를 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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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