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나효신/작곡가

2023-08-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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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프란시스코 이야기(1)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은 무척 쌀쌀하고 안개가 짙어서, 콩은 이 도시에서 키우기에 딱 좋다. 나는 뒷마당에 매년 3월 초에 스칼렛 러너 콩(Scarlet Runner Bean)씨를 심는데, 줄기가 지지대를 감고 안개 짙은 하얀색 하늘을 향해 높이 자라면, 곧 잎이 무성해지고 진홍색 꽃이 핀다. 꽃이 피면 벌과 새가 오기 시작한다. 특히 조그만 벌새(hummingbird)가 많이 날아온다. 이 꽃은 커다란 보라색 콩으로 변하고, 가을이 되면 콩을 수확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당에서 키운 콩을 넣어 지은 따뜻한 밥을 멀리서 찾아온 벗에게 대접하는 재미 또한 좋다.

2023년 봄 - 나는 몹시 바빴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아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5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씨를 뿌렸는데, 너무 늦게 씨를 뿌렸더니 절반 정도밖에 싹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싹이 난 콩나무도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다. 콩처럼 이 도시의 여름 날씨를 좋아하는 존재가 우리 집 뒷마당에는 또 있는데, 바로 달팽이이다. 6월 한 달 동안, 콩 줄기에 새로 나는 콩잎은 모두 달팽이가 먹어 버렸다. 6월 말이 되니 우리 집 콩밭은 완전히 비어 버렸다. 이전에는 6월이 되면 이미 콩나무는 많이 자라서 잎도 많고 꽃도 많이 피어 있을 시간이라, 달팽이가 아래쪽의 잎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콩나무에게는 전혀 지장이 없었는데, 올해는 적당한 시기를 놓친 나의 잘못으로 달팽이도 배불리 먹지 못했을 것이고, 콩나무는 아예 살아남지 못했다.

지난 4월에 행사를 마치고 나는 곧 땡큐카드를 여러 장 준비했다. 행사를 위해 나를 응원해 주신 분들께 보내 드릴 생각이었다. 5월에 여행을 다녀와서 카드를 쓰려다가 나는 땡큐카드에는 ‘때’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사 직후에 썼어야 마땅했다.


올해 나는 콩밭을 가꾸는 일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일에도 ‘적당한 때’를 놓쳐 버린 것이다. ‘나의 잘못’으로 콩밭이 비었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자꾸만 달팽이를 미워했다. 아주 많이! 그러나, 달팽이는 달팽이 식의 삶이 있는 것이다! ‘내가' 콩을 좋아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콩이 콩의 방식 대로’ 편안하게 자라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겸허히 내년 봄에 새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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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효신씨는 작곡가이지 음악박사로 쿠셰비츠키재단, 크로노스 현악사중주단, 바튼워크샵, 국립국악원 등 세계 여러 음악단체 및 음악가에게 작품을 의뢰받아 활동하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우든피쉬앙상블의 작곡가 단원으로도 활약중이다. 저서로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의 대화’가 있으며 대한민국작곡상 2회(1994년 양악부문 & 2003년 국악부문)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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