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미국인들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7월4일 독립기념일을 보냈다. 경제위기다 뭐다해도 불꽃축제는 어김없이 올 여름 밤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미국을 만든 독립혁명은 1775년부터 8년간 미 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13개 식민지들과 대영제국 사이에 벌어진 군사외교전이었다. 당시로서는 세계전쟁이나 다름없던 국제적인 전쟁이다.
결과는 대영제국의 13개 식민지가 신생국인 미합중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 왕실의 지원 없이는 독립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다른 나라 식민지의 독립을 도와준 프랑스는 그 여파로 자국의 왕정이 무너지고 나중에 나폴레옹이라는 또 다른 혁명가를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독립이 성공하자 프랑스혁명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가 독립하는 연쇄작용도 벌어졌다. 참고로 아이티는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만 독립이지 주변국들의 보조와 구호 없이는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 이다.
미 독립에는 프랑스의 다방면 물적, 외교적 지원뿐만 아니라 라파예트 장군 같은 군사전문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전세계에서 온 수많은 특수부대 출신 용병들의 지원처럼 그때도 다국적 용병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한편 미 독립전쟁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1775년부터 식민지 혁명가들은 세계 최강 영국해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맞서기 위해 유럽에서 이른바 외교심리전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100달러짜리 지폐의 주인공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번개와 피뢰침의 과학적 발견만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식민지 혁명군들의 독립의 명분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승만의 롤 모델같은 위인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해군이 개입하게 되었고, 13개 식민지의 통합 군대인 대륙군에게 군수 물자를 비밀리에 수송해주었다. 프랑스의 공식적인 참전은 1778년 프랑스와 대륙군간의 동맹조약으로 입증이 되었다. 미 독립운동의 실제 숨은 손들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아니라 어쩌면 프랑스의 외교 책임자들과 성공적으로 협상한 외교 실세들이 아니었을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사실상 현대판 독립전쟁이 아닐까. 러시아라는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보겠다는 투쟁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이라는 게 말로만 외치거나, 도시락 폭탄을 수백개 던진다고 되는 일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 나라의 독립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치밀한 외교전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국제관계 전략을 수립하고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결정적이다.
젤렌스키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는 전세계 선진국들을 온라인으로나 오프라인으로 찾아다니면서 자금과 무기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최강의 스폰서를 잡아 실제 탑10 서방국들의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내면서 전쟁을 수행중이다. 250년전 신생 미국도 프랑스라는 대영제국의 가장 큰 라이벌을 스폰서로 잡아 각종 지원을 얻어 독립혁명의 승기를 잡았다.
그에 비해 대한제국의 독립운동 캠페인은 과연 얼마나 국제관계 차원에서 강력한 스폰서를 잡으려는 노력을 했을까. 아니, 노력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그 노력의 명분을 기꺼이 인정해주려는 강대국이 없었던 것일까.
신생독립국을 꿈꿨던 당시의 엘리트 혁명가들이 이런 방정식 그대로 이끌었다면 대한독립만세가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냉엄한 현실은 미국이 필리핀의 통제권을 얻는 대가로 일본이 한반도를 얻을 수 있도록 미국이란 스폰서가 승인해준 것이다. 그나마 이승만이라는 미 외교가의 거물이 조선인들의 독립을 호소하고 다녔을 뿐이다.
독립은 아무리 준비되었다고 해도 주변의 큰 나라들이 상호 윈윈(WIN-WIN)을 인정해주지 않을 경우, 찾아올 수 없다는 역사적 진실을 이번 미 독립기념일을 기해 상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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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