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라, 어떤 인종, 어떤 계층, 어떤 직업의 사람이건,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고 인간다운 인격을 갖춰야 하겠지만 그러려면 우선 사람 모양새부터 갖춰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온갖 독선과 위선, 기만과 착취, 폭력과 무지, 맹종과 맹신, 부정과 부패, 권력만능주의, 무력만능주의, 금력만능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하리라.
서구식 ‘인권사상’이 종교처럼 세계 각처에 파급되고 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에 살고있는 유색인종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격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국가와 인종을 가릴 것 없이 1%의 극소수 부자들이 세계의 99% 거의 모든 자산을 소유해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지기에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Parasite)’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게 아니랴.
8억 이상의 우리 인간 가족이 굶어 죽는 세상에서 가난한 빈민국들은 여전히 부유한 강대국들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 먹을 것도 모자라는 제3세계에 선진 서방국가들은 엄청나게 비싼 무기를 강매하고 심지어는 이 무지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화학무기와 살충제 및 새로 개발되는 약품과 화장품 등을 실험하는가 하면 각종 공해 산업과 그 유독성 폐기물 쓰레기를 이들 약소국들에게 수출, 덤핑하고 있다.
서양사회에선 소위 동물애호가들이 동물들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보다 더 중요시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생존과 복리를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으나 공리공론(空理空論)의 이념적 정치적 법적 자유나 평등은 실질적 경제적 일상적 자유와 평등 없이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백인들은 수족관 속의 금붕어처럼 공중누각에 높이 앉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데 유색인들은 흙탕물 속 미꾸라지같이 살고 있다. 이들은 ‘숙명의 포로’가 된 채 ‘인과응보’의 ‘업(業)으로 전생에 진 빚을 이승에서 갚는다고 모든 것을 ‘팔자소관’ 운명으로 돌리고 만다.
물론 이러한 만병통치식 신앙과 체념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이 고해(苦海)와 같다고 비유되는, 고달픈 삶을 묵묵히 견디어 왔는지 몰라도 이들이 이처럼 숙명론적 사고방식과 정신적인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인권다운 인권을 말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최근 100여 년 역사만 돌이켜 보더라도 한민족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침해당해 왔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 이어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합방이 그 한 예라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우리나라 국토의 분단이 또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동강 난 우리 민족의 비극은 필연적으로 미, 소 양 진영 사이냉전의 열기 속에서 그 더욱 참혹한 비극인 한국전을 불러일으켰고 1953년 휴전이 되었으나 긴장이 완화되지 않은 채 우리의 분단체제는 초강대국들의 국익을 위해 굳어져 왔다.
개인이나 국가, 민족 간에 각자 제힘을 길러 자존, 자립할 때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하늘도 스스로를 돕는자를 돕는다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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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