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나의 친애하는 에블린

2023-06-08 (목) 이하연(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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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합니다. 미국에 온 지 3달밖에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던 그때, 아들 학교 입학식 날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에서 유독 꼿꼿하게 서 있던 당신이 기억납니다. 동양인 외모지만 원어민 발음을 쓰는 당신에게 나는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불편할까봐 입 떼기가 두려웠습니다.

학교에서 종종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작은 얼굴에 선글라스를 쓰고,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말수가 적어 보이는 모습이 왠지 편안했습니다. ‘나는 무해합니다’라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내느라 피로한 나와 달리, 당신은 항상 차분해 보였습니다. 억지로 웃음 짓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아 보이는 당신이 부러웠습니다.

알고 보니, 등원을 담당하던 나의 남편은 이미 당신과 종종 대화를 나누고 있었더군요. 남편에게서 당신 가족과 주말에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무척 반가웠습니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은, 전날 집에서 오래도록 연습했던 문장이었습니다. 나는 그간 모자란 영어 실력 때문에 내 사고 수준까지 어린아이가 된 듯한 묘한 패배감이 젖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말을 끝까지 할 수 있게 기다려 주고, 과장되게 천천히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나는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해 왔습니다. 서울 어디에 집이 있는지, 어느 대학 출신인지, 직장은 어디인지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명함의 글자가 모두 지워진 나도 누군가에게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3일째 정전이 지속되어 도시 전체가 얼어붙어 있던 날, 남편이 출장 가고 없다는 말을 당신에게 했습니다. 당신은 차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나에게 왔습니다. 혹시 밤에 도움이 필요하면 당신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당신을 뒤돌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가족, 친척 하나 없는 미국에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뒤돌아서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이미 당신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은 샘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기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기 전, 새로운 영어 문장 몇 개를 되새겨 봅니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영어 실력이 조금이라도 좋아진다면, 그건 당신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은 그런 소소한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불완전한 나를 존중해 주는 당신 덕분에, 나는 나의 단점을 드러내고, 도움을 받고, 그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즐거움을 배워 갑니다.

<이하연(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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