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경락의 법률 칼럼 - ‘방탕한’ 여자들 사건

2023-05-26 (금)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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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에 따르면 지난 5월9일 하루에만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각지에서 1만 1,000여 명이나 되는 불법 이민자들이 텍사스와 애리조나주 등 미국의 남부 국경지대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COVID-19 방지책으로 불법 월경자들을 즉각 본국으로 추방하도록 발동한 행정명령(‘타이틀 42’)이 5월 11일부로 만료됨으로써 벌어진 진풍경이다.
‘타이틀 42’가 소멸되면 불법 이민자라 하더라도 정치적 망명 등을 신청할 경우 이민법원에 사건이 계류되는 동안 미국 체류가 가능해진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접경지역에 국경순찰대원 2만 4,000여 명 외에 미군, 국토안보부 직원, 법원집행관 등 가용 인원을 총동원하여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이런 연방 차원의 부산한 움직임과는 달리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정작 이들이 넘어올 경우 각종 뒤치다꺼리에 시달려야하는 텍사스나 애리조나 같은 주정부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잠잠하기만 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1876년 연방대법원의 ‘치룽 대 프리맨’(Chy Lung v. Freeman) 사건에 있다.
바야흐로 19세기 중반의 미국은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에 이어 동서를 관통하는 대륙철도 건설 등으로 대량의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남북전쟁으로 흑인 노예제마저 폐지되자 흑인 노예를 대체할 외국 인력이 절실했던 것인데 이때 중국 노동자들이 구원투수로 등장한다.

원래 미국과 중국은 1844년 ‘왕샤조약’, 1858년 ‘텐진조약’ 등으로 맺어진 불평등 관계였지만 거대한 중국 시장과 값싼 중국인 노동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1868년 ‘벌링게임-시어드 조약’(Burlingame-Seward Treaty)을 통해 파격적으로 중국에 최혜국대우를 선사한다.

이는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 러시아와 동등한 대우로 중국인의 자유로운 입출국과 미국에서의 활동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이 덕분에 중국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들어왔다.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중국인들의 자세는 많은 유럽계 이민자나 미국인들에게 자칫하면 중국인들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지역 정치인들은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반 중국인 정서로 유권자를 선동, 자극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점차 홀대를 당하게 된다. 아울러 이들 노동자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보니 중국인 커뮤니티에서는 성매매도 공공연히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문제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중국인들의 매춘 문화를 퇴폐행위로 간주하고 ‘음탕하고 방탕한’(lewd and debauched) 여자들이 미국에 입국하려면 한 사람당 500달러(현재가치 1만2,700달러)의 보증금을 내야하는 법을 만들었다. ‘음탕하고 방탕한’ 여자는 매춘부를 가리키는 코드네임이었다.


1874년, 22명의 중국 여성들이 500여 명의 중국 남성들과 증기선 ‘JAPAN’호를 타고 홍콩을 출발, 30일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이민당국은 중국 여성들의 입국심사 답변이 성실하지 않다는 핑계로 그들에게 보증금 500달러를 내든가 아니면 홍콩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치룽’을 비롯한 중국 여성들은 보증금을 낼 돈이 없어 결국 구금되었고, 이들의 변호사 ‘리앤더 퀸트’(Leander Quint)는 여성들의 구금을 풀어달라며 ‘인신보호영장’(writ of habeas corpus)을 신청했다.

캘리포니아주 대법원까지 갔으나 기각된 사건을 접수한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만장일치로 ‘음탕하고 방탕한’ 여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헌법에 의거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문제는 연방정부의 역할인데, 주정부가 섣불리 여기에 개입하다 보면 당사국과의 조약 위반 등으로 국제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이민정책이나 이에 따른 불법 월경문제 등까지 외교적 분쟁 소지가 있는 사안은 연방정부에 일임키로 함으로써 현재처럼 텍사스나 애리조나 주정부는 피해 당사자임에도 팔짱을 끼고 방관하게 된 것이다. 사법부 우위 미국식 삼권분립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한 장면이다.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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