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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엔데믹,‘펜타데믹’

2023-05-23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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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시애틀의 한 모텔 방에서 한살 난 아기가 엄마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피운 펜타닐 연기를 마신 후 호흡곤란증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 갔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선 부모의 마약을 사탕인줄 알고 먹은 11개월 아기가 최연소 펜타닐 과다복용 희생자가 됐다. 앨라배마의 한 살짜리 아기, 남가주의 15개월 아기도 각각 부모들이 방치한 펜타닐 알약을 먹고 숨을 거뒀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미국 전역에서 어린이 1,550여명이 펜타닐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편계열인 오피오이드의 합성마약 과다투약이 처음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2013년에 비해 3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2000년 이후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숨진 어린이는 5,000명을 상회한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코비드-19 팬데믹이 창궐했던 2020~2021년에 발생했다.

물론 팬데믹 기간의 전체 펜타닐 희생자 수는 훨씬 많다. 지난해 펜타닐 과다투약으로 숨진 미국인은 총 10만9,680명으로 연방질병통제센터가 집계했다. 베트남 전쟁 20년간 발생한 미군 전사자의 거의 2배이며 9.11 테러 후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전사자의 10배 이상이다. 매 5분마다 한 명씩 펜타닐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다.


헤로인이나 모르핀보다 강도가 50~100배 높으면서도 값은 터무니없이 싼 펜타닐이 미국인들의 ‘국민마약’으로 자리 잡은 건 오래 전이다. 연방 마약단속국(DEA)은 2년 전 남녀노소 미국인들을 모두 치사시키고도 남을 양인 3억3,300만회분의 불법제조 가짜 펜타닐을 압수했다고 발표하고 미국이 무소부재의 펜타닐에 공격받아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고 경고했다.

펜타닐은 옥시코돈, 하이드로코돈, 모르핀 등 오피오이드 계열의 진통제 중에서 환각중독성이 특히 강해 ‘죽음의 마약’으로 불린다. 미국 청장년층 사이엔 펜타닐 과다투약이 암과 심장병을 제치고 사망원인 1위로 꼽힌다. 한국에선 ‘좀비마약’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펜타닐을 과다 투약할 경우 호흡지장에 따른 뇌의 산소공급 부족으로 행동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기 때문이다.

원래 수술환자나 말기 암 환자 등의 극심한 통증 치료제로 1990년대부터 의사들이 즐겨 처방한 펜타닐은 2000년대 들어서 척추나 관절 등 만성통증에도 폭넓게 처방됐고 쌈박한 진통효과 때문에 인기가 치솟았다. 곧 이어 멕시코 카르텔(범죄조직)들이 자국에서 재배된 아편에 중국이 생산한 전구체 화학물질로 싸구려 펜타닐을 만들어 밀수출하면서 미국이 골병들었다.

펜타닐 가루를 헤로인이나 메스(히로뽕)에 섞어 만든 진짜 같은 가짜 진통제가 거리에 범람한다. 중독성이 상승돼 치사량을 쉽게 초과한다. 최근엔 펜타닐보다도 센 ‘자일라진’까지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다. 말과 소 등 동물의 진정제인 자일라진을 펜타닐에 혼합하면 바늘에 찔린 피부도 낫지 않고 계속 번지면서 썩어 결국 뼈까지 드러나게 된다.

LA 한인타운엔 다운타운 못지않게 마약사범들이 준동한다. 쓰고 버린 주사기들이 거리에 널려있다. 멋대로 움막을 짓고 노숙하는 홈리스들이 십중팔구 펜타닐 중독자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주민이나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고 건물 벽에 방뇨하기 일쑤다. 한국에서 방문 온 친지들에게 그런 꼴을 보여주기 싫어 타운에 안내하지 않는다는 한인들이 많다.

한국에선 아직 펜타닐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석열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유아인, 서민재, 남태현 등 몇몇 연예인들이 히로뽕 투약혐의로 기소됐다. “(마약사범이) 5년간 5배 늘었을 뿐인데 무슨 전쟁선포냐”고 어떤 야당 정치인이 힐난했단다. 웃긴다. 미국은 기소는커녕 마약사범들에게 새 주사기와 해독제를 공짜로 뿌린다. 때를 놓쳤기 때문에 밀리는 전쟁을 하고 있다.

미증유의 피해를 안겨준 코로나 팬데믹이 엔데믹(주기적 유행병)으로 잦아들었지만 한인들은 그보다 피해가 결코 적지 않은 ‘펜타데믹’(펜타닐+에피데믹)에 언제까지 시달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연방의회가 관련법을 강화하고 있다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스스로 10대 자녀부터 단속할 일이다. 한국에선 펜타닐이 피자 한판 값이라지만 미국에선 담배 몇 개와 맞 거래 된단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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