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12월 31일 그리고 할머니

2023-05-12 (금) 전한나(UX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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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31일, 새해를 2시간도 채 앞두지 않은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우리 가족은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아빠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고모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었다. 할머니가 쓰러지신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다는. 그것은 어떤 일말의 가망성을 담은 것이 아닌, 차마 죽음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내뱉고 싶지 않은 표현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든을 갓 넘기신 할머니는 이따금씩 병원 신세를 지시기는 했어도 정정하셨다. 휴가로 잠시 한국에 와 있는 손녀딸에게 고기를 사주시겠다며 날짜를 잡자고 말씀하신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우리는 어떤 작은 하얀 방으로 안내되었고,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오열하는 사촌과 고모 사이로, 하얀 천으로 뒤덮인 채 차가운 침상에 뉘어 있는 할머니의 작은 몸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하얀 천.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으신 후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모는 전해주셨다. 애절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나는 아빠가 무척 걱정되었다. 통곡이 가족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과 달리 아빠는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의 모든 근육은 아빠의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감정들에 의해 꿈틀대고 있었다. 장남인 아빠는 오롯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새 없이 바로 장례 절차에 대해 관계자와 이야기하러 가셨다. 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아빠를 따라다녔다.


장례도 하나의 산업이라 그런지 장례 절차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은 사무적이었다. 한 사람의 생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저물었는데, 관련해서 돈에 관련된 옵션들이 나열되고, 그 안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꽤 잔인하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왔다. 새해의 기쁨으로 시끌벅적한 세상과 달리 병원은 매우 고요했고 밤하늘은 새까맸다. 그리고 눈이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눈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매우 느린 속도로. 그 포근한 눈이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치 할머니가 눈이 되어 내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 이후로 3번의 12월 31일을 보냈다. 새해로 넘어가는 이 시간이면 슬로우 모션으로 함박눈이 내리던 그 까맣던 밤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렇게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신 할머니를 추억한다. 그리운 할머니, 우리 다시 만날 때 그날 밤 눈송이가 얼마나 예뻤는지 이야기해 드릴게요.

<전한나(UX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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