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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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팔아 불행을 산 여자

2023-04-29 (토) 제이슨 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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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여사는 올해 75세다. 48년 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이 어렵던 시절이라 편도 비행기표 한 장씩 들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린 부부는 마중 나온 지인의 도움으로 남편은 전기 기술을 배웠고, 석 여사는 세탁소 일을 배우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채 단칸방 신세도 면치 못한 상태에서 딸아이가 생겼고, 맨손으로 시작한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일날 교회 가는 것 외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며, 변두리에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할 때 쯤 또 아들이 태어났다.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바쁘게 사업에 매달리던 젊은 시절 그의 가족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가족 나들이 한번 못해, 부인 정희자 여사는 남편과 함께 계곡물에 발 담그고 한나절 쉬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는데 석 여사도 못지않은 삶을 살았다.

세월은 흘러 딸은 버클리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살고 있고,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는데 결혼해서 쿠퍼티노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남편이 훌륭한 전기 기술자가 되어 비싸기로 소문난 샌프란시스코에 집을 두 채나 가진 부자(?)가 되어있었다.


석 여사에게는 그녀가 초청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사는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들이 있었지만 자기 자식들 챙기는 것 밖에 모르고 사는 지독하게 인색한 누나, 언니였다. 동생들은 아무도 석 여사를 좋아하지 않았고 왕래도 없이 지냈다.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 딸과 변호사가 되어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아들 부부…. 석 여사는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숨 돌리고 남편과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내야할 즈음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다. 돈과 자식밖에 모르고 살아 온 석 여사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정원 한쪽 구석에 쓰러져 돌아가신 것이다. 장로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온 남편은 가족을 위해 머슴처럼 일만 해온 사람이었다.

석 여사는 홀로 남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혼자서는 남은 생을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물만 났다. 동생들에게 가혹하리만큼 인색하게 대했던 자신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성 좋은 여동생 K 를 불러 혼자서는 못살겠다며 함께 살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동생 집에 얹혀사는 동안 골프도 배우고, 전부터 해오던 요가도 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찾을 때까지 2년반을 함께 살다 독립해서 나갔다.

석 여사는 집 2채를 모두 팔아서 아들과 딸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노인아파트로 들어갔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낡은 아파트는 희미한 형광등의 어둠처럼 사람의 마음도 어둡게 만들었다. 몇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치매 초기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식들은 바쁘다며 죄 없는 형제들만 귀찮게 굴었다. 형제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자식들에게 넘겨준 다음이라 석 여사 수중에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죽기 직전이라고 해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들은 그만두고, 중국에 가있는 딸에게 연락을 하자 딸이 와서 석 여사를 양로원에다 집어넣고 돌아갔다. 치매 초기인 석 여사는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고 가끔씩 제 정신이 들면 그나마 자신을 상대해주는 동생 K에게 전화해서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여기 와 있어? 나좀 데리고 나가줘...”하고 괴롭힌다고 했다. 두 자식들 먹고사는데 아무 걱정 없는데 왜 집 두 채를 팔아서 200만불이 넘는 돈을 먼저 나누어주고 자신은 그렇게 불쌍한 처지가 되어야했을까? 그 돈으로 자신의 인생을 즐겁게 살다가 남으면 그때 주면 될 것을…. “다 주면 굶어죽고, 반만 주면 쫄려 죽고, 안주면 맞아죽는다”는 말이 있다. 서글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주위에 또 다른 석 여사가 울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겠다.

<제이슨 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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