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온앤오프

2023-04-17 (월) 김미혜(한울 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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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노트북을 열어서 부팅할 때의 기분이 좋다. 조용한 새벽의 정적을 깨우고 키보드 소리가 내 주위를 가득 메우는 이 기분이 너무 좋다. 고작 책을 읽고 정리를 해 두거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일지라도, 이 시간의 나는 누가 뭐래도 '쓰는 사람'이다. 뭐든지 잘 먹기로 타고난 아이가 매번 비슷한 밥상에서도 엄지척을 올려줄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잘 먹어주는 그 마음이 그저 고맙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는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 이야기하게 만드는 비결은 그냥 잘 들어주는 것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 말까지도 하게 된다. 입을 굳게 닫게 하는 데는 큰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들어주지 않으면 된다.

'글은 오독의 자유가 있다.' 이 말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자유를 주는 말이다. 내가 쓰는 대로 읽지 않아도 되는 자유, 누구라도 내가 의도한 대로 해석하지 않아도 괜찮을 자유. 노트북을 종료하고 가방 안에 넣을 때의 기분은 더 좋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나의 분명한 선을 그으며 가방의 문을 봉하는 것에 나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연결이 끊어진 상태로 누리는 즐거움도 연결이 되어있을 때만큼이나 좋은 것.

엄마에게 오늘 아침 지역 신문에 실린 글 링크를 보냈다. 엄마의 반응은 늘 예측 가능하다. "오늘 글은 더 좋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늘 엄마 몫이다. 콩깍지 안경을 쓴 고슴도치 엄마의 편파적 판정임을 알면서도 매번 듣는 그 말에 마음이 녹는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나를 위해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오늘도 나쁘지 않다고 자족하는 철학은 원조 엄마표다.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실 때, 나는 '행복'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꺼내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온전히 나만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주변을 정돈하고, 기다리는 몇 초의 시간도 식어버리도록 두지 못한다. 커피는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사소한 선물이고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확인 도장이다. 밤을 몰아내고 다시 맞이하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생각이 간절해지는 이 단순함이 내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온앤오프’ 매일 반복하여 무심히 버튼을 켜고 끄는듯한 사소한 행동에도 나의 의지가 담겨 있다. ‘플라세보 placebo’는 ‘나는 즐거워질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심리학에서는 ‘고통을 가라앉힌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환자에게 가짜 약을 처방해도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진심 어린 공감이 담긴 말’은 플라세보 효과가 있다. 매일 이 약을 먹으면서 ‘나는 즐거워질 것이다’라고 되새긴다. 삶의 정수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있다.

<김미혜(한울 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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