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성북구 하월곡동, 초딩 시절만 해도 논이 있고 밭이 있어 메뚜기를 잡고, 논두렁에서는 미꾸라지를, 밭에서는 무나 감자를 서리할 수 있었던 시골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동쪽에 있던 논길을 지나면 옛 성동역에서 출발해 어딘지도 모르는 연천으로 간다는 단선 기찻길이 있었다.
그랬던 고향은 중딩 시절에 완전히 도시화가 되어, 고딩 시절에 고향은 마음에만 오붓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향이 어디요?” 하고 물으면 “고향이 없답니다.” 라고 답하곤 했지.
어릴 적 뒷동산에 올라 따먹은 진달래 꽃맛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뒷동산에는 창신동에서 이사 온 동덕여대가 자리하고 있다. 동덕여대가 들어오기 전에 수도방위 사령부 군대가 들어와 고향의 산을 지워버렸지만...
그랬던 나에게 고향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게 마음에서 생긴다는 ‘일체유심조’란 말이 어느 정도 새김질되면서부터다.
사진을 조금이라도 더 잘 찍으려 여기저기로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는 기자를 보며 “그걸로 나를 담을 수 있나?” 하며 미소를 지으셨다는 성철 큰스님 말씀도, 마음은 사진에 담을 수 없기에,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고.
진달래꽃이 내 마음 고향의 꽃이라면 벚꽃은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 우리나라 벚꽃놀이하면 진해 군항제가 유명하지만 본 적은 없고, 학창 시절 하얗게 내리던 창경원 밤 벚꽃이 눈가에 머물고 있다.
그때 함께 갔던 지인이 사진작가가 되어 뉴욕에서 전시한다기에 만났는데 그때 그 모습이 아니었음에 가만히 웃을 수밖에 없었지.
“당신이 그때는 참 고왔는데..” 하며 따뜻하게 손을 만지며 미소 짓는 마음은 그때를 오늘로 느끼는 것, 쭈글쭈글하고 마른 손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젊어서일 때인 팽팽한 손 감촉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일체유심조를 잘 모르는 것이니 삶 의미의 반을 가리고 살고 있는 게 된다.
뉴욕에 살면서 매년 피는 벚꽃놀이 봄맞이라 하며 워싱턴 디시로 자주 떠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봄이 오면 피는 꽃일 뿐 아니라 뉴욕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굳이 5~6 시간 드라이브 해 가는 마음을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 이가 태반이다. 그뿐인가 일체가 마음에서 피는 꽃이라면서 벚꽃놀이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
없지! 설혹 마음에서 벚꽃이 피지 않고 있다 해도 비디오만 틀면 가장 화려한 벚꽃 무리가 눈앞에 펼쳐지지 아니하는가. 그런데 그는 모르고 있는 게 있다. 이 세상을 마음으로 다 볼 수 있지만, 보는 눈이 곧 마음(눈마음)이라는 것을 그는 모른다.
마음에 피어있는 꽃을 ‘마음의 눈’으로 여기에서 볼 수 있지만 꽃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게 쉽지 않은데, 눈이 마음이 되어 디시에 가면 꽃과 ‘눈마음’이 하나가 되어 꽃이 나요 내가 꽃이 된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니 “꽃구경 가시죠”라고 권하지는 않지만, 나는 올해도 짬을 내어 꽃구경을 떠나려 한다.
<
홍효진/뉴저지 보리사 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