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는 나에게 뭐 좋은 옷을 사다가 입혀놓아도 폼과 자세가 나오지를 않는다고 불만이시다. 너도 다른 사제처럼 좀 의젓하고 멋있고 품위 있게 다니라고, 왜 맨날 시꺼멓게 머리는 산발이고 아무 옷이나 막 입고 다니냐고 못마땅해 하신다. 한 번은 한국에 가서 머리를 깎는데 이발사가 이것저것 말을 거는데 내가 아는 게 없고 대답도 제대로 못하니 불현듯 하는 말이 “아저씨 농사지으세요?” 하고 묻는다. “아뇨. 아닌데요!”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내게 “신부님은 막 살아오신 것 같아요” 한다. 내가 막 살아 오다니? 볼멘 소리로 반문을 하니깐 금새 미안한지 “쉽고 곱게 편하게 자라지 않았다는 소리입니다” 하고 덧붙인다. 설마 욕은 아니겠지 찝찝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아무리 잘 입혀놓아도 폼이 안난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옷을 걸쳐 놓아도 고상하고 품위 있지 않다. 한마디로 막 생겨먹었다는 소리이다.
글쎄 신학교 생활 8년 한국군대 2년 반, 10년 넘게 다 남자들 조직에만 몸을 담고 살아왔으니 내 인생도 평범한 인생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나는 쉽고 편하게 삶을 살아오지를 못했다. 옛날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교의 고해신부님께서 “너는 뭐든지 네가 해봐야 아는데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라고 하신 말씀처럼 내 인생에 아픔과 고통과 좌절 그리고 어려움은 대부분 내가 다 자초한 일이다.
옛날 서울 신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리다.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들어간 신학교 생활은 그냥 외롭고 허전하고 슬프고 아프고 힘이 들었다. 아프니깐 청춘이란 말대로 떨어지는 혜화동 낙산의 나뭇잎에도 마음이 저려왔다.
그 시절 낙산을 헤매며 묵주알을 돌리던 친구들, 같이 아파하고 동거 동락했던 신학교 친구들과 같이 우리 잡초처럼 살자고 굳게 다짐을 했다. 콘크리트 블럭 사이에 올라오는 아무리 짓밟히고 짓밟혀도 죽지 않고 살아서 올라오는 잡초처럼 살아 남자고 했다.
신학교 생활이 정말 어렵고 힘이 들 때마다 친구들과 그같은 다짐을 했다. 지금 미국까지 와서 신부가 되고 여기까지 돌고 돌아 살아 온 것을 보면 마치 내 인생은 잡초라는 표현이 틀리지는 않다. 성서에서도 잡초에 대한 비유가 나오지만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
달갑지 않고 반갑지 않은 존재 실한 열매도 못 맺고 땅을 못쓰게 하고 좋은 씨앗을 숨막히게 하는 필요없는 존재이다. 그중에 하나가 겨자씨 비유가 있다. 물론 겨자는 향료나 요리에 쓰이지만 농사짓는 이에게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 겨자씨는 생명력이 강해 한 번 퍼지면 걷잡을 수가 없어 밭을 다 버리고 다른 농사를 망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지천으로 보이는 게 겨자나무이다. 나무라기보다 울창한 잡초 덤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겨자씨를 하느님 나라에 비교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 (마태오 복음 13:31-32)
이처럼 무서운 생명력을 가진 잡초와 같은 겨자씨를 하느님 나라와 비교를 하시니 참 놀라운 일이다. 놀라운 생명력 즉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고 새롭게 일어나는 끈질김이 마치 고통과 시련의 역사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온 우리 민중들의 놀라운 생명력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있다(루까 17:21) 고 하신 것이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놀라운 생명, 어떠한 시련도 극복하는 놀라운 의지, 어디에서도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나갈 수 있다면야 잡초가 뭐 어떠냐? 나, 잡초처럼 살련다.
<
조민현/팰팍 성 미카엘 성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