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팝송산책] 독자와의 인터뷰 - 유고명 박사 (5)

2023-03-24 (금) 정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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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산책] 독자와의 인터뷰 - 유고명 박사 (5)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음 진로는?

수련의 과정을 위해 한국 대신 미국을 택하고 1973년 시카고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받은 월급은 1,000달러였으며 주택 사용료로 200달러를 지불하였다. 첫 월급은 부모님께 보내드렸는데 지금도 그때의 흐뭇함을 잊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이라 어떻게 음악을 애호했는가?


처음 본 미국의 음반 산업은 놀람 그 자체였다. 국내에선 거의 복사판 음반만 보던 나로서는 원판을 보니 하루 종일 구경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떤 매장은 3층으로 구성되어 고객들의 구매력을 위해 최대한 자극했다. 그 당시 LP 레코드 가격은 5달러, 독일 그라모폰 회사 제품인 클래식 음반은 7~8달러이고 제가 특별히 선호했던 릴 테이프는 10달러였다. 당시 주말마다 그곳에 들러 클래식 5장, 팝 5장 정도 구매했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약 5,000장 정도 수집했다. 그 당시 가스값은 갤런 당 30센트였다. 오디오 시스템으로는 Marantz, Sansui, Pioneer, Fisher 등이었고 고급 제품으로는 McIntosh가 있었다.

-언제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정착했는지?

1985년 이곳으로 이주하여 CPMC 병원,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컨설팅 닥터로 근무하면서 별도로 개업했었다.

-1990년부터 그동안 음반 산업을 주도해온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가 서서히 쇠퇴하고 디스크 콤팩트인 CD가 새로운 대체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베이 지역의 대형 레코드 점포인 ‘Pacific Stereo’, ‘Amoeba’, ‘Tower Records’ 등이 앞다퉈 CD 음반을 유통하기 시작하자 음악 애호가들은 서서히 이 새로운 경향에 동참했다. 이때부터 CD 구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당시 CD 음반은 콘텐츠가 제한적이라 레코드 수집과 병행해야 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좋은 면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많이 있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언제나 내가 갖고 싶었던 오리지날 음반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고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아버님과 장인을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주선해 주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는 미국대학병원들이 한국보다 조금 앞서 있었고 다행히 내가 UCSF 국제진료센터 고문 의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쉽게 성사된 것이 최대의 행복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했던 뮤지션이 베이 지역에서 많이 거주했다고 알고 있는데

“‘키 보이스‘의 멤버 김홍탁, ‘바보스’의 서니 킴, ‘트리퍼스’의 김훈, ‘귀여운 배비’ 노래로 유명했던 김계자, 한국 라틴 음악의 대모 이춘희 등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패티 킴이 벌링게임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경영했었는데 그곳에 가끔 방문했다.

-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여러 사람으로부터 유박사가 음악에 많은 조예가 깊은 줄 몰랐다고 하며 그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는데 마지막으로 하고픈 얘기가 있는지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저의 대한 관념이 신경과 의사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음악 지식과 열정이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미국에 와서 의사로서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또한 무료의료 봉사를 20년이나 할 수 있었던 것에 보람을 느끼고 항상 옆에서 많은 조언을 해준 아내 이성희와 아버지의 바쁜 활동속에서도 무탈하게 자라준 세 자녀에 고마움을 가지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끝으로 이 지면을 할애해 준 한국일보에 고마움을 표하며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빈다. (끝)

<정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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