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불타고 있다. 프랑스가 분노하고 있다. 파리 마르세이유 낭트 등 도시마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철도노조 파업으로 기차가 멈추고, 교사 파업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쓰레기수거업체 파업으로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시위대는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지르며 경찰과 맞서고 있다. 불길이 치솟고 폭죽이 터지고 최루가스 연기 자욱한 지 두 달이다.
시민혁명의 나라, 프랑스가 연금개혁을 둘러싼 마크롱 정부 대 시민들의 대립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집권 2기를 맞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고, 노조를 비롯한 대다수 국민들은 절대반대를 외치며 투쟁 중이다. 23일 노동단체들의 연대 총파업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투쟁은 절정에 이르고 프랑스는 마비 직전이다.
마크롱이 1월 중순 발표한 연금개혁안의 핵심은 정년 연장이다. 현재 62세인 정년을 매년 3개월씩 늘려 2030년까지 64세로 연장하고, 연금 100% 수령 기준을 근로기간 42년에서 2027년까지 43년으로 늘린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더 오래 일하라는 것이고 근로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선다. 정년과 연금을 바라보는 마크롱과 일반시민들의 시각이 많이 다르다.
전직 투자은행가이자 재무장관이었던 마크롱(45)은 ‘숫자’를 본다.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은 연금 시스템이 이대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금은 자신이 세금으로 적립해둔 것을 은퇴 후 받는 게 아니다. 현직 근로자들의 봉급에서 원천 징수되는 세금으로 기금이 조성된다. 문제없이 가동되던 연금 시스템이 삐걱거리는 것은 인구구조 변화 때문. 은퇴인구는 늘고 근로인구는 줄어드는 추세가 문제이다.
프랑스 당국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2000년 근로자 2.1명이 은퇴자 한명의 연금을 대던 것이 2020년 1.7명으로 줄었고, 2070년이면 1.2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조만간 재정이 고갈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연금 수령 연령을 늦추는 게 급선무라고 마크롱은 주장한다.
반면 프랑스 시민들은 ‘인생’을 본다. 프랑스인들은 삶의 질, 일과 삶의 균형 그리고 안락한 은퇴생활을 대단히 중시한다. 일하고 돈 버는 게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 많이 낸 후 62세에 은퇴해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그들의 문화이다.
연금은 보통 현역 당시 봉급의 74%. 의료보험과 생활비(연금)를 국가가 보장해주니 프랑스의 노년은 여유롭고, 안락한 노후는 그들에게 자부심이자 권리이다. 그런데 정부가 여기에 메스를 대겠다고 하니 국민들은 분노했다. ‘64세, 노우’ ‘이제는 전쟁’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국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운 것은 마크롱이 ‘편법’까지 동원해 개혁을 강행한 것.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낮자 마크롱은 헌법 49조 3항을 들고 나왔다. 상황이 긴급할 경우 정부가 의회 동의 없이도 입법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다. 이를 막으려면 의회는 정부내각 불신임 결의를 해야 하는데, 지난 20일 두 번의 시도가 실패하면서 마크롱의 연금개혁법안은 사실상 채택되었다. 2차대전 직후 군소정당 난립으로 입법기능이 마비되고 국정이 난국에 빠지는 일이 잦아지자 1958년 만들어진 법이지만 행정부가 입법부를 과도하게 제압,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이 근년 제기되어 왔다.
프랑스의 격렬한 시위사태를 보다보니 러다이트 운동이 떠올랐다. 산업혁명 초반인 19세기 초 “기계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영국의 노동자들이 기계를 때려 부순 사건이다. 사람이 하던 일을 방적기가 도맡아 해내자 생계의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고 공장과 소유주 집에 불을 지르는 폭동이 수년간 이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비현실적이다 못해 웃음이 나오는 슬픈 해프닝이다. 하지만 수천년 우리 몫이던 것을 갑자기 잃게 되자 노동자들의 충격은 컸다.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은 도도했고, 사람들은 기계와 더불어 일하는 데 익숙해졌다. 기계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된지 오래다.
산업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면 인구 고령화도 그 못지않은 대세이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점점 오래 사는 반면 출산율은 저조해서 생산연령 인구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 근로자 한명이 은퇴자 두세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정년 62세를 64세로 올린다고 시민들이 격노한 사태가 앞으로 50년쯤 후에는 어떻게 보여질지 모르겠다.
정년과 연금에 대한 인식은 앞으로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현실을 직시하자”는 마크롱의 말에 프랑스 국민들은 반발하지만, 이대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연하게 누려온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62세에 연금 100% 받으며 은퇴하는 삶은 조만간 과거가 될 것이다. 사회복지 잘 되어 있는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도 정년은 65세 이상이다. 미국에서 소셜연금 100% 수령 나이는 67세 68세로 계속 올라가고, 65세 이상 연령층의 20%는 여전히 일을 한다. 미국 근로자의 25%는 이러다 평생 은퇴 못하겠다고 막막해한다. 길어진 노년을 버틸 만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도 개인도 풀기 어려운 딜레마, 은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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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