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소녀들이 미래의 청사진을 품고 청파 언덕에서 만난지 54년의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의 세월은 풋풋하고 아름답던 소녀들의 미소를 반백의 머리와 기품 어린 노안의 미소로 바꾸어놓았다.
젊은 날에는 톡톡 튀는 개성과 자기주장의 관철을 위해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으나, 이제 연륜이 더한 노년의 내적 성숙은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너그러운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노년의 아집이나 자기주장을 고집한다면 우정의 분열과 파열음이 생기겠지만, 우리의 만남은 마찰음 없이 서로 감싸고 격려해주는 잘 조율된 화음을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다. 우리는 서로에게 믿음과 축복을 보내며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남편의 직업으로 일생의 절반을 외국과 한국을 오가는 삶 속에서도, 귀국하면 언제나 같은 자리 푸근한 우정의 품에 안길 수 있어서 내내 행복했다.
남미의 페루에서 사는 동안 친정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없는 비행기 노선으로 때맞추어 귀국할 수가 없었다. 마음만 슬프고 아플 때, 친구 전원이 내 대신 딸 노릇을 해주었던 고마운 사연도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의 선물이다.
일 년 주기로 회장 직을 맡고, 그 회장은 특유의 개성과 봉사로 입학 동기의 절반이 참석하는 동창회를 이끌어간다. 타국이나 지방에 삶의 터전이 있는 친구들도 따뜻한 마음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어느 중년의 12월, 부부동반으로 망년회를 갖게 되었다. 부인의 동창회에 참석해주는 고마운 남편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 낭독하자는 제안에, 쑥스러워서 못한다고 이구동성이었다.
상품까지 내놓으며 우여곡절 끝에 편지쓰기가 성사되었는데, 기억에 남는 친구의 재미있는 글이 떠오른다. 진지한 사연 뒤끝에 “아빠, 아이들 잘 키우고 아내 역할 충실히 했으니 밍크코트 한 벌 사주이소”. 예측불허, 돌발 상황의 멘트에 장내는 환희와 웃음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코비드로 만나지 못할 때는 카톡이나 전화로 안부를 챙겼고, 근자에는 54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매달 두 번째 수요일 12시에 어김없이 우리는 만난다.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이처럼 만날 날을 설렘으로 기다린다.
만나면 변화하는 시류를 얘기하고, 흔한 유머나 시시껄렁한 잡담도 “그래 맞아”, 재미있게 웃으며 맞장구 쳐주는 편한 사람들이다. 카톡에 올려주는 시나 산문, 일상의 평범한 일들까지도 모두 즐겁게 댓글을 달아주고 행복해한다.
“함께하는 노년은 외롭지 않습니다. 노년의 아름다운 우정은 소녀적 설레던 그때처럼, 즐거운 얘기 보따리를 풀어줄 약속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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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우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