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자투고] 청년 의사 장인환, 전명운

2023-03-15 (수) 신재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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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미주 이민 120주년이 되는 해다. 동시에 청년 의사 장인환과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D. W. 스티븐스 대한제국 외교 고문을 저격한 지 11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08년 3월 20일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기자와 인터뷰한 기사가 다음 날 아침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실렸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는 것이 대한제국에 유익하다. 그로 인하여 한일 양국 사람들 사이에 교제가 친밀하고 밀접해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다스리는 것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보다 나은 대우를 하고 있다. 일본의 보호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은 대한제국에 친일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득권을 잃은 소수의 불평 불만자들이다. 농민들과 백성은 일본의 보호정책을 환영한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서 생각이 어둡고, 정부 관리들은 부패해서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다. 그리고 백성이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러시아에 넘어갈 것이다.'


뉴스는 순식간에 한인 동포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기사를 읽은 동포들은 울분을 금치 못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한인 동포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모두 공립협회 사무실에 모였다. 한인 대표 4인을 스티븐스가 묵는 페어몬트 호텔로 보내 신문 기사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사과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천연덕스럽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공립협회로 돌아온 대표 4인의 보고를 듣던 동포들은 격분했다. 성격이 급한 청년 전명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말할 것 없이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결연히 외치는 전명운의 얼굴에는 심오한 각오가 엿보였다.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진 듯 조용해졌다. 모두 전명운을 쳐다만 볼뿐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해치우겠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키가 크고 말수가 적은 청년 장인환이 일어섰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직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나도 지원하겠소.”

그때 전명운의 나이 25살이었고 장인환은 32살 청년이었다.

3월 23일 오전 9시 15분. 드디어 스티븐스와 일본 총영사를 태운 리무진이 샌프란시스코 페리 빌딩 시계 타워 앞 녹색 존에 차를 세웠다. 리무진은 컨버터블(convertible)로 지붕이 열려 있었다. 총영사 소지 고이케(小池張造)가 먼저 차에서 내려 스티븐스의 짐을 챙겼다. 리무진 뒤 트렁크를 열고 여행 가방 하나를 꺼내 인도교에 내려놓았다. 또 다른 가방을 꺼내려고 뒤 트렁크로 갔다. 고이케가 내리면서 열어놓은 리무진 승용차 문에서 스티븐스가 오른발을 내밀면서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서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서려는 순간 때를 놓칠세라 전명운이 바짝 다가가 흰 손수건에 싸인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가슴을 겨눴다. 한 발짝도 안 되는 지척의 간격이다. 방아쇠를 당겼다. “딱” 소리만 나고 말았다.

불발이다. 다시 당겼다. 총탄은 발사되지 않았다. 스티븐스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전명운이 달려들면서 권총 자루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스티븐스는 전명운의 공격을 피하려고 뒤로 물러서면서 두 손을 들어 권총을 쥔 전명운의 오른팔을 잡았다. 팔이 잡혔다고 해서 이십 대 혈기 왕성한 전명운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다시 덤벼들어 왼손 주먹으로 스티븐스의 턱을 내려쳤다. 스티븐스는 전명운의 주먹을 피하느라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전명운의 권총이 불발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장인환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오른팔을 높이 들어 스티븐스를 겨눴다. 스티븐스와 전명운은 둘이 뒤엉켜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장인환은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숨을 들이마신 후 잠시 멈췄다. 스티븐스에게 영점을 맞췄다. 살며시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금속성 파열음과 동시에 한 발이 나갔다. 발사 반동에 팔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다시 숨을 죽이고 영점을 스티븐스에게 맞춤과 동시에 두 발을 연거푸 쏘았다. 순간적인 일이다. 불운하게도 첫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두 번째 실탄은 스티븐스의 등에 맞았고 세 번째 실탄은 스티븐스의 허리를 관통했다. 스티븐스는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리볼버 권총은 5연발이다. 아직도 2발이 남아 있다. 장인환의 계획대로라면 한 발을 더 스티븐스에게 쏘고 마지막 한 발로 자결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장인환의 옆에 서 있던 세관원 색스톤(Saxton)이 권총을 들고 있는 장인환의 오른팔을 내려쳤다. 장인환은 들고 있던 권총을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총성을 듣고 모여든 군중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상황을 판단하느라고 웅성댔다. 어림잡아 백여 명은 되지 싶었다. 출근 시간대여서 사람들로 복작일 때였다. 분위기를 감지한 군중들은 하나같이 동양인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동양 놈을 잡아라. 린치하라.”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린치(Lynch)란 인민재판식으로 즉석에서 민중의 심판을 받아 목을 매 죽이는 사형이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백인들에게 둘러싸인 살벌한 분위기를 피해서 일단 군중 밖으로 뛰어나갔다.

전명운은 마켓 스트리트(Market St)로 달려가다가 이스트 스트리트(East St)로 접어들었다. 어깨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다. 더는 뛸 수 없었다.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장인환은 39번 부두 쪽으로 내달렸다. 소살리토(Sausalito) 연락선 선착장 앞에서 멈췄다. 잠시 숨을 골랐다. 여기서 도망갈 일이 아니다.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의연히 둥근 기둥에 기대서서 경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신재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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