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새해가 밝았던 1903년 1월13일.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던 구한말 시절, 102명의 조선인들을 태운 미국 상선 ‘갤릭호’가 일본 나카사키항을 출발한지 11일 만에 호놀룰루항 외곽 샌드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1902년 12월22일 일본 상선 겐카이마루호에 몸을 싣고 제물포항을 출발할 때만해도 121명이 승선했었으나 나카사키항에서 미국 이민당국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19명이 하선했다. 샌드 아일랜드 정박 중 실시된 이민국 신체검사에서 16명은 입국이 끝내 거부됐다. 결국 남성 48명과 여성 16명, 어린 자녀 22명 등 86명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들 이민 선조 중 절반 가량은 미국 감리교 교단 선교사였던 아펜젤러가 제물포항 개항과 함께 1885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제물포 웨슬리메모리얼교회’(현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었다. 올해로 이민 120주년을 맞는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발점이었다.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하와이로 건너 온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에서 주 6일 하루 10시간씩 고된 노동을 견뎌냈다. 같은 해 11월 미국 최초의 한인교회였던 한인감리교선교회(현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다.
일부는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하와이에 남았고 일부는 새 삶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LA로 재이주했다. 1909년에서 1910년 사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스시코의 공립협회, 대동보국회가 통합해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됐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잃은 미주 한인들에게 대한인국민회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또 국가이자 무형의 정부였다. 척박한 이민 생활 중에서도 한인들은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 운영비를 댔으며, 악착같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이처럼 한인 이민 선조들의 이민사는 파란과 질곡의 가시밭길과 감격과 환희의 길을 교대로 걸으며 써내려 온 불멸의 대서사였다. 86명에 불과했던 한인 인구는 연방 센서스국 조사에서 2022년 12월 현재 195여만명에 달하고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억척같이 일하며 미국 생활에 정착했던 한인들은 ‘맘&팝’ 스타일의 소매업을 거쳐 이젠 주류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굵직한 기업들을 키워 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었던 2012년 6월 백악관 공공업무실은 미주 한인들의 경제 규모를 에콰도르와 맞먹는 세계 65위로 평가하기도 했다.
계묘년이 두번 지난 2023년.
뜻 깊은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이민 선조들의 걸었던 고난과 희망의 여정을 기억하기 위해 갤릭호의 항로를 거꾸로 거슬러 태평양 횡단에 나서는 담대한 도전이 펼쳐진다. ‘미주 한인요트클럽’ 회장이자 원정대장인 남진우씨 등 4인의 원정대가 37피트 짜리 대항해용 요트 ‘이그나텔라호’에 몸을 싣고 오는 3월4일 LA 인근 마리나 델 레이를 출발한다.
강에서 산란한 연어가 성어가 되어 바다에서 살다 알을 낳을 때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듯 4인의 원정대가 LA에서 하와이를 거쳐 인천까지 대항해에 나서는 것이다. 총 항해거리 9,000여 마일에 두달 반이 소요되는 말 그대로 ‘대장정’이다.
특히 인천은 지난 2003년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이민사 박물관이 세워진 곳이자 전세계 한인들의 염원이었던 재외동포청이 들어설 유력한 후보지여서 이번 항해의 의미를 더 하고 있다.
태평양 요트 횡단 원정대의 출항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한인사회에서 응원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개인과 단체, 기업에서 후원금과 후원 물품이 답지했다.
114년 역사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LA한인회가 원정대원들을 초청, 격려행사를 가졌다. 한국 정부를 대리하는 LA총영사관도 다음 주 초 원정대에 태극기를 전달하고 성공적인 항해를 응원할 계획이다.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와 인천 내리교회가 소속된 한국의 감리교단도 하와이와 인천에서 원정대를 따듯하게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막막한 어둠으로/별빛조차 없는 길일지라도/포기할 순 없는 거야/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뜨겁게 날 위해/부서진 햇살을 보겠지’ (가수 강산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중에서)
86명의 이민 선조들로 시작한 미주 한인 이민사는 별빛조차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도 뚜벅뚜벅 전진해 오늘의 눈부신 한인사회로 이어졌다. 부디 태평양 요트 횡단 원정대가 120년 한인 이민 역사 속에 축적된 이민 후손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조국에 널리 전하고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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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