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거 좋아하면서 하자”
도쿄 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이 된 안산(20) 선수가 경기 후 한 말이다. 그는 “좋아하는 거 좋아하면서 살자”가 그의 신조라고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양궁 2관왕이자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된 김제덕(17) 선수도 이겨도 져도 “파이팅을 외치면서 경기의 흐름을 즐기자”는 자세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는 올림픽 출전에 앞서 마음 다스리는 법을 써놓고 자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우승의) 욕심을 갖자, 욕심에 앞서 자신을 믿자, 자신을 믿기보다 즐기면서 쏘자”라고.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 하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공자의 말도 있지 않은가.
2011년 9.11 직후 뉴욕타임스에 희한(稀罕)한 전면광고가 실렸었다. 지면 한가운데 고인의 사진 한 장과 출생과 사망 일자와 함께 그 밑에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긴 ‘놀이를 즐기라(Enjoy the Game)’는 ‘유언’이었다.
우리가 구름잡이라 할 때는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가 ‘구름(clouds)’이라 할 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기보다 ‘데이터 구름(data clouds)’이나 ‘네트워크 구름(network clouds)' 을 말할 정도로 자연계와 기술계가 구분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2015년 출간된 ‘경이로운 구름(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에서 아이오와 대학 커뮤니케이션 교수 존 다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 1958 - )는 클라우드가 우리의 새로운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에 잡다한 모든 것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몸이 단말기가 되어 구름과 우리 몸 사이에 문서와 영상이 흐르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흔히 매체가 환경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逆)도 또한 진(眞)이라는 주장이다.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비숍 버클리라고도 불리는 George Berkeley/Bishop Berkeley 1685-1753)는 “세상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The world is all in our minds.)”라고 했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리라.
우리 선인들은 인생이 하늘의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했다. 구름이 있으면 천둥·번개도 있게 마련이다. 달라이 라마의 육성이 담긴 음악이 빌보드 뉴에이지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앨범은 그 제목이 ‘내면세계(Inner World)’라는 만트라(Mantra) 진언(眞言)을 암송하는 명상음악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시선을 안으로 돌려 마음을 돌아보고 우주로 비전을 넓히라는 뜻이리라.
“네 세상 너, 난 내 세상 Your world is you. I am my world.”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979-1955)의 ‘소나무 숲속 작은 닭들(Bantams in Pine-Woods)’에 나오는 한 시구(詩句)이다. 스티븐스는 낮에는 직장인 보험회사 일을 보면서 밤에는 어떻게 자신과 세상이 서로에게 의지하는지, 어떻게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세상을 자신이 창조하게 되는지, 평생토록 시작(詩作)을 통해 천착(穿鑿)했다고 한다.
2016년 출간된 미국 시인 폴 마리아니(Paul Mariani, 1940 - )의 평전 ‘The Whole Harmonium: The Life of Wallace Stevens”에 따르면 스티븐스에겐 뭣보다 신(神)의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진부한 문구가 아닌 영구적인 도전으로 이를 그는 예술과 윤리적인 문제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뤘다.
우리가 스폰서로서의 신(神)의 후원 없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의를 우리가 찾아 만들어 낼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븐스 시(詩)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해법이란 한 때 종교가 맡았었던 역할을 이젠 시(詩) 혹은 더 넓게 우리의 상상력이 수행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스티븐스는 ‘예술지고의 픽션 (supreme fiction of art)’이라 명명한다.
어차피 인생이 소꿉놀이 소꿉장난 같다면 이렇게 놀면 어떻고 저렇게 놀면 어떠리.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놀이와 장난을 할 필요도 없고 같은 길을 갈 이유도 없으리라. 그리고 매사에 너무 심각할 것도 없지 않을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겠지만 그래도 각자는 각자 제멋대로, 제 마음대로, 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보는 것 이상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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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