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타인의 고통

2023-02-13 (월) 김미혜(한울 한국학교 교장)
작게 크게
지난주, 점심 초대를 받아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 고국의 명절 ‘정월대보름’을 맞이하여 준비했다는 5가지 곡물을 섞어 만든 찰밥과 아홉 가지 나물들이 한상 가득했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나물들을 마련하였을까. 오늘같이 특별한 밥상을 위해 한여름 동안 햇볕에 잘 말려 준비해 두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을 겨울철을 미리 준비하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이 담긴 밥상이었다. 다양한 색깔과 맛을 내는 나물은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묵은 나물은 일반 나물보다 영양소가 더 풍부해서 건강식으로도 영양 만점이다. 대보름날에는 다른 성을 가진 세 집 이상의 밥을 먹어야 그 해 운이 좋다고 하여 여러 집 오곡밥을 서로 나눠 먹기도 했다는데 적어도 다른 성을 가진 세 집 이상이 모여 밥을 먹었으니 올해 운수가 대통하겠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떠들며 즐겼던 그 시간, 튀르키예(터키) 남부와 시리아에는 지진으로 건물 6천여 채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알았다. 그날 하루에만 사망자가 수천 명이 넘었고 구조대와 구조 장비를 기다리다 못한 튀르키예·시리아 주민들은 가족과 이웃을 찾기 위해 맨손으로 건물 잔해를 파헤치고 있었다. 영하의 날씨에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지켜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것일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동떨어진 타인의 고통이다. 그러고 보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도 1년이 되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했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전으로 흐르고 있다. 1년간 참혹한 상황이 계속되었을 테지만 나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로 무뎌져 버렸다. 한국의 친구는 올겨울 가스비 고지서를 받았을 때 그제야 전쟁의 여파를 실감한다고 토로했다.

미국 에세이 작가 수전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튀르키예 대통령이 일주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한나 아렌트는 고통을 두고 “가장 사적이면서 가장 전달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는 쉬우나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살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김미혜(한울 한국학교 교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