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다.
창가에 서서 지붕과 거리에 쌓인 눈을 보고 있으려니 좋으면서도 심란하다. 27도라 해도 체감온도는 더 낮을 테니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과 극,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윈터 스톰이 도시를 장악해 시민의 발목을 붙잡았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우리도 집에 갇혔다. 한데서 지내는 분들을 생각하면 황홀한 감옥이겠지만, 이틀째 매장을 못 연 남편은 쉬는 게 가시방석이다. 요즘 사업하는 지인 중 리커 스토어 하는 분 빼곤 매출이 줄어서 모두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날씨까지 안 받쳐주니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첫날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며 엉뚱한 데다 화풀이하던 남편이 오늘은 누그러졌다. 포기한 모양이다. 미리 장을 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일기도 했지만, 나 또한 포기했다. 이참에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다 소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비우는 중이다. 특히 냉동실은 녹이기 귀찮아 안 해먹은 게 많아서 한 번쯤 그래야 했다. 뭘 그렇게 많이 쟁여놨는지 나도 놀랐다. 닥치면 안 될 것도 없고, 못 할 것도 없는 것 같다. 다 적응하고 살기 마련이다.
나는 유독 ‘첫’이라는 관형사를 좋아한다. ‘첫’이 붙은 말들은 왠지 설렌다. 처음이어서, 첫 경험이어서 그렇다. 첫눈, 첫사랑, 첫차, 첫 여행, 첫 월급, 첫아기, 첫 키스….
물론 첫 교통사고처럼 기억하기 싫은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다. 그 말에 얽힌 추억이 아름다우면 더더욱 그렇다.
수필반 수강생들에게 첫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제목으로 글을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었다.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 소환되기를 바랐다. 일주일 후 첫 제자, 첫 집, 첫돌, 첫 만남 등 여러 작품이 탄생했다. 그 글을 쓰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가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추억을 회상하며 잠시나마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함께 나누는 우리도 덩달아 행복했다.
지난 1월, 딸내미가 첫 소개팅을 했다. 두 아이를 가르쳤던 음악 선생님이 주선했다. 우리가 들은 상대방의 정보는 이러했다.
“얼굴은 기대하지 마라, 키가 작다, 착하고 똑똑하고 진국이다, 여자 친구는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다닌다, 부모님도 너무 좋은 분이다.”
외모보다는 인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남편과 딸을 존중해 만나 보라고 했다. 딸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있던 날 우리는 오만가지 고민을 했다. 데이트는 딸이 나가는데 왜 우리 부부가 술렁거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지, 화장은 어느 정도 해야 할지. 남자가 작다는데 신발은 뭘 신어야 할지, 음식은 어떤 걸 먹어야 할지… 처음이다 보니 기준이 없었다. 나가던 딸이 물었다.
“근데 밥 먹고 돈은 누가 내는 거야? 더치페이하면 되나?”
“글쎄 한국에선 남자가 대부분 내는데 여긴 미국이니 따로 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경험이 없어 모르겠다. 눈치껏 해.”
겨울 방학 2주 동안 두 번 만나고 딸은 학교로 돌아갔다. 봄방학까지 못 볼 텐데 딱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빡센 수업이 시작되자 딸은 정신이 없이 바빠졌고 그 와중에도 전화나 문자가 오면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텍사스, 한 사람은 마이애미에 있으니 만날 수도 없고, 수업 때문에 통화도 어렵고 이래저래 사회인과 학생의 만남은 뭔가 장애가 많았던 모양이다. 결국 둘은 한 달도 안 돼서 헤어졌다. 남자가 보냈다는 문자를 읽어보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이라 어른인 줄 알았는데 이기적이고 배려라고는 없어 보였다. 은근히 상처가 되었을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나 같으면 이불 뒤집어쓰고 며칠 울었을 텐데 딸은 그런 면에서 쿨했다. 음악 선생님이 오히려 미안해했다. 자기가 그 애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던 것 같다며 다른 아이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딸내미는 공부에 방해돼서 안 되겠다며 남자친구는 졸업 후에 생각해 보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딸은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우리 부부는 딸의 첫 이성 친구가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까짓 소개팅 하나 망친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다가도 자꾸만 서운했다. 내색은 안 해도 얼마나 속상했을까 생각하니 다음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장 정리를 하다가 선반 위에 올려진 박스를 발견했다. ‘첫’이라는 이름이 붙은 딸의 물건이 든 상자다. 첫 배냇저고리, 첫 유치, 첫 발레복과 발레 슈즈, 첫 교복, 첫 한복, 첫 원피스, 첫 신발, 첫 양말… 앨범에도 첫들이 적혀 있었다. 처음 엄마라고 부른 날, 처음 뒤집은 날, 첫발을 뗀 날…. 모아 놓길 참 잘했다.
아무쪼록 내 딸이 살면서 만나게 될 모든 ‘첫’은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안전하고 공의롭고 따뜻하고 평화롭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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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