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우기철다운 비가 내리고 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땅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이제야 촉촉한 피부를 드러낸다. 그야말로 최고의 자태를 뽐내는 이 시기가 아닌가 싶다. 날씨가 제법 푸근해져 오랜만에 마당에 나왔다. 잔디와 쑥, 상추와 아욱의 새순들이 애교스런 예쁜 그린으로 나를 반기고, 손가락을 쑤욱 들이밀어보니 땅은 문을 활짝 열어 기분 좋은 흙내음을 뿜어준다. 그리도 딱딱하기만 하던 우리집 돌짝밭이 다 어디로 숨었나 싶다.
예전 집들은 7년을 채 살지 못하고 이사를 했기에 예쁜 꽃과 나무를 심어 한창 첫사랑을 나눌 즈음 헤어져야 함이 많이 서운했었다. 그래서 이번 집은 이사온 지 5년이 넘도록 마당을 가꾸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나를 다시 마당으로 불러냈고, 20년이 넘도록 부러지지도 않는 나의 영원한 무기인 호미를 잡게 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집 마당은 이제 제법 여러 과일나무들과 내가 좋아하는 꽃, 채소들로 둘러져 있다. 어찌나 돌짝땅과 씨름을 해대었는지 손목 관절이 성하질 못해 주사를 맞으면서도 또 마당에 살고 있는 나는 아마도 땅의 매력이 주는 묘한 중독에 빠져 있는 듯하다.
가만히 마음을 기울여 땅의 소리를 듣노라면 여러가지 교훈을 말해주기에 나는 땅을 위대한 스승이라 칭한다.
말없이 입을 벌려 물만 머금으며 침묵하는 겨울의 기다림을 땅은 다음을 기약하는 쉼이라 말한다. 이 기다림 속에서 성장점이 살아숨쉴 수 있음을 알려주는 땅의 가르침을 따라 나도 마당 쉼터에 앉아 묵언의 침묵 속에 내 몸을 맡기며 큰 숨으로 삶의 기다림을 연습해 본다. 쉼이란 단절이 아닌 자칫 정지될 듯한 내 삶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기다림이라는 터널을 지나 또 다른 성장의 시작이 되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무엇을 심어도 마다하지 않고 깊은 뿌리를 내리며 무성한 잎과 꽃을 피워 결국은 열매를 선사하는 땅은 무엇보다 정직하다. 그런데 막상 땅이고 싶은 내 마음은 편견이 심하고, 거짓되며, 심히 부패하여 이에 합당한 열매를 내어주지 않는 변질된 땅이 되어 버렸다. 마음에 퍼져만 가는 질긴 뿌리의 잡초를 제거하지 않았고, 방패막을 해주지도 않고 번져가는 병충해만을 탓했다. 꾸준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튼튼하지 못한 연약한 줄기만을 원망했다. 작은 꽃은 세심한 마음으로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돌보아야 했는데 무심하고 관심 없는 눈길만을 주었고 오직 예쁘고 큰 꽃의 화려함만을 바라보았다. 그러기에 수확이 없을 때 열매는 거저 맺히지 않음을 처절하게 교훈해주는 땅의 목소리를 나는 다음 해, 또 그 다음 해에도 들어야 했다.
아, 나는 내 마음이 땅이고 싶다. 하나를 더 얹어, 구하지 않은 유익한 것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내 마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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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 임(산호세동산교회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