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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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사람

2023-01-11 (수)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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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전으로 돌아가 삼성전자 주식을 사서 묻어뒀더라면, 강남에 땅을 샀더라면, 비트코인을 대량 샀더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크다 보니, 과거에 비트코인을 샀으면 현재 얼마나 벌었을지를 알려주는 ‘내가 그 돈으로 비트코인을 샀으면’ 웹사이트가 등장했는가 하면, ‘만약 그때 삼성전자 주식 샀다면 어떻게 됐을까?’와 같은 분석 기사들도 꾸준히 나온다.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상상은 지난해 최고 흥행작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속 시원히 구현됐다. 주인공인 진도준(송중기)은 인생 2회차를 살아가는 인물로 새로운 인생에서 ‘순양그룹 회장 되기’를 목표로 삼는다. 그는 본래 인생에서 순양그룹 오너 가족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았던 윤현우 팀장이었지만, 비자금 세탁 중 살해되고 순양그룹 막내 손자로 다시 태어난다. 1987년으로 돌아가 두번째 인생을 살게 된 진도준은 본인만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 주식 투자, 기업 M&A 등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며 그를 머슴 취급했던 재벌가 가족들과 대적한다.


그의 짜릿한 성공 서사는 시청자들에게 대리 만족을 안겨줬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시청하는 동안 만큼은 진도준이 되어 그의 성공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특히 시청자들은 진도준은 무엇을 해도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진 채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고, 그 안전한 감각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불안함을 배제시켰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빠져나오면 이내 허탈해지고 만다. 드라마처럼 이전 생의 의식과 기억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과거로 회귀해 다시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계층 이동은 물론 작은 꿈조차 간직하고 살아가기 어려워진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삶의 태도만큼은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재정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동반자살을 했다가 미래에서 과거로 진행되는 인생을 한번 더 살아가게 되는 한 연인이 등장한다. 연인은 시간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과거 그들이 처음 만났던 순간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 두 번째 삶을 다시 시작한다. 두번째 삶을 사는 그들은 매순간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동반자살을 했던 그 순간에 진입하고 그들은 세 번째 삶을 살아간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힘겨웠던 첫 번째 삶과 행복으로 가득 찬 두 번째 삶, 세 번째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람은 대개 불확실한 미래 앞에 좌절하고 불행을 느낀다. 만일 미래에 내가 원하는 일이 이뤄지고, 현재의 고민이 나중에는 별 것 아닌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예언가가 미리 일러주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은 반에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소설 속 연인은 미래를 훤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삶을 살았고, 그러자 불확실성은 사라지고, 감사가 삶에 깃들었다. 인식의 패턴이 바뀐 연인은 세 번째 삶에서는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한다.

이 소설은 화자의 깨달음과 함께 끝맺어진다. 화자는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고 말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p.35)고도.

2023년 1월도 어느덧 3분의 1이 지났다. 올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깊은 시간의 눈을 가지고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살아봤으면 좋겠다. 두려워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고, 마치 다가올 미래를 모두 아는 사람 마냥 그저 자신을 믿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다 보면 감사의 마음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 지닐 법한 마음과 태도를 가질 때야 말로 나약한 인간이 영원처럼 현재를 누릴 수 있는 기적의 문이 열릴 수 있다.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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