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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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외출을 꿈꾸며

2023-01-07 (토) 이보람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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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3월에 포르투갈 여행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떠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두 살배기 큰 딸과 3월이면 8개월이 되는 둘째를 놔두고 나는 일주일간 집을 비울 것이다.

여동생이 곧 결혼을 하는데 내가 메이드 오브 오너가 되어서 이번 베칠러렛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갈까 하다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애들 클 때까지 멀리 여행은 못 갈 것 같아서 큰맘 먹고 포르투갈 여행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이 여행을 위해 물밑작업이 일찍이 시작되었다. 우선 아이들을 봐줄 수 있는 지원군단인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 스케줄을 모두 체크했다. 다행히 모두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다. 큰 애는 그때쯤이면 유치원에 잘 적응해서 크게 문제없을 것이고 젖먹이 둘째는 3월이 되면 단유를 하고 슬립 트레이닝도 시도해볼 예정이다. 곧 시작할 둘째의 이유식도 미리 넉넉히 만들어 두고 가야 한다.


예전에는 하루 전날에 비행기표 알아보고 바로 그다음 날로도 훌쩍 떠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것저것 미리 할 일이 많다. 내 부재로 인한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해 놓아야 할 것도 많고 애들 아빠에게 가르치고 당부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 여행준비는 시작도 못했는데 남겨질 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느낌이다.

애들 생각하면 걱정도 되지만 이번 여행은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매일 24시간 제대로 된 퇴근이 없는 엄마라는 이 굴레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그날만 바라보며 버티고 있다. 오늘도 여행 준비 카톡방에서 내 심장은 벌써 포르투갈을 향해 뛰고 있다며 우리 마음 약해지지 말고 꼭 가자고 다짐했다.

오늘은 옷장 정리를 하는데 임신, 출산 전에 회사 다니며 입던 예쁜 옷들, 둘째 생기기 직전에 이제 첫 애 낳고 예전 몸으로 돌아왔다며 좋다고 산 새 옷들이 한 트럭이 나왔다. 신발장에도 애엄마 되고는 신지 못하고 있는 부츠며 하이힐들이 먼지만 뽀얗게 쌓이고 있다. 모유 수유 생각 안 하고 옷 입고 애들 둘러업을 일 없어 뾰족구두 좀 신고 포르투갈 여행을 할 생각을 하니 엔도르핀이 마구 돈다.

남편은 큰 애 유치원 보내 놓고는 유치원 앱에 아이 활동 사진 언제 올라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는 내가 그 먼 데 가서 애들 걱정 없이 여행이나 제대로 하겠냐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여행도 가기 전에 초치는 남편을 힘껏 째려본다.

내일이면 비행기표도 사고 본격적인 여행 계획도 세울 참이다. 3년 동안 엄마로 살면서 수고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휴가다. 아이들이 눈에 밟히겠지만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떠나는 날을 꿈꾸며 아끼는 스카프를 제일 먼저 짐가방에 챙겨본다. 내일은 좋아하는 하이힐도 한 켤레 챙겨 넣어야지. 그리고 근 3년간 아이들 사진 일색이었던 내 SNS도 오랜만에 화장한 화사한 내 얼굴 사진들로 도배해야지. 지금은 비록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아이들 사이에 쪼그리고 누워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말이다. 아줌마의 화려한 외출이 멀지 않았다. 그때까지 지치지 말고 파이팅!

<이보람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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