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어느 성공회신부가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하는 환상을 기도로 표현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비슷한 것을 정신과에서는 ‘과부 환상(Widow Fantasy)’이라 부른다.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비행기나 자동차 사고로 꼴딱 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부환상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 한 두번은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다. 과부환상이 있다 해서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과부환상이 계속 마음속으로 밀려오면 심한 죄의식과 더불어 스트레스가 쌓여 의사 진료실을 찾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 대한 얘기보다 배우자를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헛말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속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프로이드는 이같은 슬립 오브 텅(Slips of Tongue, 헛말)으로 인한 말실수는 절대 우연이 아니고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망이 의식 밖으로 새어나오는 현상이라 설명했다. 예를 들면 남편을 죽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남편을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요” 라고 헛 나오는 경우다.
여자들이 과부환상을 주로 호소한다. 특히 남편이 자기에게 함부로 하며 매사에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 경우들이다. 남편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심한 욕설과 함께 때릴 것 같은 태세여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숨죽이고 살아간다. 당장 이혼하고 싶으나 혼자 살 용기도 없고, 자식들도 아직 다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남편의 폭행 가능성 때문에 무서워 엄두도 못 낸다.
과부현상을 가진 여자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두어가지 공통점이 있다. 편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애정이 결핍된 결손가정에서 자랐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화도 잘 안내는 착한 아이란 말을 들었다. 이런 아이들은 모범생,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순위에 두고 주위 사람들 눈치를 보며 산다.
또 지금의 남편과 비슷한 사람과 데이트 했거나 깊은 관계를 맺었던 전력들이 있다. 정신적으로 이상한 남편도 문제지만 환자 자신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남편은 자애적 성격이나 반사회적 성격이 강하고, 아내는 자괴감과 열등감이 많은 의존성과 강박적 기질의 소유자들이 대부분이다.
과부환상은 치료가 어렵다. 환자가 이제껏 지녀온 자신의 방어체제를 내려놓고, 오랜 습관들을 버리면서 변화의 길을 모색할 힘과 용기를 갖춰야하기 때문이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그 원인의 하나를 뇌신경과 유전자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 뇌는 복잡한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항상성을 선호한다. 뇌는 환자에게 현재의 상황에 도전하거나 변화를 주지 말고 그냥 익숙해진 예전의 상태에 안주하라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환자가 나쁜 남자들을 계속 만나고 또 그들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유전자는 환경을, 환경은 본성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지속적 치료를 통해 계속 환경이 바뀌게 하면 환자의 뇌도 변화할 수 있다.
치료자 역시 유연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환자와 대화할 수 있는 자질을 지녀야 한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언가란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력도 요구된다. 더불어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서 도움을 주는 실질적 방안들을 제시해주어야 된다. 무시하고 학대하는 남편과 헤어질 용기를 갖지 못하고 대신 남편이 사고로 죽어주었으면,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으면 하는 환상을 버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남편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고 극복할 힘을 갖도록 돕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다.
인간은 미완성으로 태어나 미완성으로 땅에 묻힌다. 미완성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고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쌓여야 결혼생활도 지속된다. 과부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과 기억에서 벗어나야 지금 이 순간의 시공간에서 내적 평화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한 번 사는 인생,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영혼으로서 자신의 삶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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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