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재성 박사의 두 도시 이야기] 코리아타운,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2025-11-27 (목) 12:00:00 조재성 LA 포럼 회장·도시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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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재생은 콘크리트의 기술이 아니라, 기억의 윤리에서 시작된다.

할리웃이 ‘환상의 중심’으로, 베버리힐스가 ‘부의 정원’으로 완성됐다면, 코리아타운은 여전히 ‘미완의 문장’으로 살아 있는 기억의 도시다. 불완전함 속의 생명력, 그 불안정함 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도시의 인간적 얼굴이다.

낮에는 화려한 간판이 거리를 덮지만, 밤이 찾아오면 그 아래 숨어 있던 기억들이 별처럼 쏟아진다. LA라는 거대한 별자리 속에서 할리웃은 신화의 중심이고, 베버리힐스는 완성된 궤도다. 그러나 코리아타운은 여전히 흔들리며 숨쉬는 도시의 심장이다. 이곳은 이민자들의 언어와 냄새, 노동의 땀과 음악이 뒤섞여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기억의 실험실이다.


1992년 4월, 로드니 킹 사건 이후 불길이 도시를 삼켰을 때, 코리아타운은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한 커뮤니티의 민 낯을 드러냈다. 그날의 화염은 단지 상점의 유리창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누가 도시의 일부로 기억되고, 누구는 잊히는가”라는 냉혹한 질문을 남겼다. ‘루프탑 코리안’이라 불리는 총을 들고 옥상에 선 상인들의 절규는 단순한 폭동의 장면이 아니라, 도시의 기억이 얼마나 선택적으로 기록되는가를 드러내는 비극의 시였다.

‘은막의 꿈’을 판매하는 할리웃은 신화로, ‘오리지날 명품’을 과시하는 베버리힐스는 브랜드로 자신을 완성했다. 부족함이 없는 도시는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설 여백이 없다. 그러나 코리아타운은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존재했다. 그 불완전함 이야말로 도시의 생명이다. 실패와 시도, 노동과 꿈이 뒤섞인 문장속에서 다양한 피부와 언어가 어색하지만 아름답게 공존한다. 완결을 거부한 도시, 그 불안한 리듬이 오히려 인간의 온기를 품고있다.

도시는 인간이 쓴 가장 긴 산문이지만, 때로는 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도시계획은 기능을 우선하며 효율의 도면에만 갇혀 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민자의 체온, 라틴 음악의 리듬, 오래된 노포의 냄새, 포장마차의 김이 사라져가는 자리에 유리 타워만이 솟구친다. 메트로 역 주변은 럭셔리 고층아파트로 바뀌며, 자본의 속도가 공동체의 숨결을 압도한다. ‘이민의 서정’은 ‘투자의 논리’에 밀려 희미해진다.

도시계획학자 트리디브 배너지(USC)가 말했듯, LA는 ‘불확정성의 도시’다. 코리아타운은 그 불확정성의 중심에 있다. 서류미비자, 다언어의 혼종, 낮과 밤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회복력은 닫힌 도시가 잃은 ‘우연의 윤리’를 되살린다. 할리웃이 스크린의 도시라면, 코리아타운은 아직 끝나지 않은 K-드라마다. 예측 불가능하고, 그만큼 살아 있다.

재개발의 압력에도 오래된 거리의 숨결을 간직한 서울 익선동의 밤은 매일 젊은 인파가 모여들어 흐린 불빛아래 주점에 앉아 새로운 감각을 피운다.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새것의 반짝임보다 오래된 한옥의 온기를, 브랜드의 화려함보다 서로의 이야기가 스며드는 낮은 공간을 사랑한다. 그 거리에서는 직업과 연봉, 출신 배경이 대화의 장벽이 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향기와 언어가 섞이는 순간을 즐긴다. 그들은 알고 있다. 도시가 잃은 것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시간의 품격이라는 것을.

밤이 되면 코리아타운도 서울 익선동과 다르지 않게 젊은이들로 붐비며, 낮보다 더 밝게 빛난다. 코리아타운 6가에서 백인, 라틴, 흑인, 아시안의 젊은이들이 백열전구 조명 아래서 웃고 춤추는 장면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 즉 ‘기억의 지도’가 새로 그려지는 의식이다.

진정한 재개발은 낡음을 지우는 파괴가 아니라, 기억을 다시 배열하는 예술이다. 건축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에서 시작되는 일이다. 도시가 살아 있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기억이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 기억의 리듬이 이어질 때, 도시는 다시 숨을 쉰다.


코리아타운이 할리웃과 베버리힐스를 넘어서는 길은 더 높은 타워나 더 밝은 조명이 아니라, ‘공존의 기술’을 세우는 일이다. 정체성 없는 번영은 허무로 사라지고, 번영 없는 정체성은 소외로 끝난다. 코리아타운의 내일은 건물과 길, 사람과 시간이 서로의 의미를 다시 짓는 순간에 열린다. 그때 건축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존재의 이야기를 공간으로 번역한 문장이 된다.

도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 취향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타인의 리듬을 배우는 일이다. 코리아타운의 미래는 설계도가 아니라, 매일 아침 펼치는 멕시컨계 노점의 활력, 저녁 노을 아래 벤치의 대화,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눈망울 속에 있다.

“누가 이 거리에 남을 것인가?”

도시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다. 기억과 공존이 하나의 리듬이 될 때, 내일의 코리아타운은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할 것이다. 이미 우리 곁에 내일은 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조재성 LA 포럼 회장·도시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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