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조용한 명절

2025-11-27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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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조용히 술렁거린다. 소란하지 않은 움직임이다. 아직 학기 중이고 12월 초에는 기말시험이 있어 여느 때보다 더 일상에 집중하여야 함에도 명절이 주는 흥분이 오가는 발걸음에 담겨있음이 느껴진다. 식품점마다 입구에는 추수감사절 식재료들이 산같이 쌓여 있다. 올해는 터키를 구울 것도 아니면서 괜히 그 근처에서 서성인다.

예전에는 일 년 내내 식당 부엌에서 일하면서도 가게 문을 닫는 추수감사절 날은 오갈 데 없는 교인들을 모두 식당으로 초대해 음식을 나누곤 했다. 터키를 며칠 전부터 밑 간을 한 물에 담가 숙성해 두었다가 추수감사절 아침부터 오븐에 넣어 하루 종일 구웠다. 한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불고기와 잡채도 준비하여 두 나라 명절 음식을 한자리에 차려 냈다. 지금 생각하면 일 년에 두 번 쉬는 그 귀한 휴일에 또 일할 생각을 어떻게 했을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지금보다는 젊었고, 식당에만 갇혀 지내느라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 같다. 식사하고 나면 남편은 사람들을 몇 팀으로 나뉘어 앉혀 놓고 게임을 하곤 하였다. 낱말을 주고 연상하여 그림 그리며 알아맞히기, 성경 속의 인물 알아맞히기 등 다양한 게임을 하였다.


아이들은 부모와 한편이 되어 자기네 팀을 응원하느라 소리 지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어오르기도 했다. 서로 남이지만 이렇게 한바탕 어우러져 웃고 떠들며 놀고 나면 이 세상 어떤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 친밀감을 느끼곤 하였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교수로 임용되어 갔다가 안식년을 보내러 이번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가정이 그 당시의 기억을 추억하며 새삼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때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였는데 추수감사절에 초대받아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겁게 지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올해도 두 딸은 시댁 식구들과 추수감사절을 보낸다. 큰 애가 결혼한 해에 시댁에서 추수 감사절에 우리까지 모두 초대하여 양쪽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었다. 그다음 달에 있는 성탄절에는 자연히 우리 집에서 모인 것이 계기가 되어 해마다 추수감사절은 시댁에 가고 성탄절에는 집으로 왔다. 작은 애도 결혼하더니 언니를 따라 한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명절이라 요리할 일도 없는데, 매장에 진열된 터키가 자꾸 나를 부추긴다.

터키와 그린 빈, candied yams와 펌킨 파이를 만들어 추수감사절 디너를 근사하게 차리고 싶어진다. 몇 가정 초대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정겨운 명절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음식 장만하는 즐거움보다는 버거움이 더 앞서는 까닭이다. 공연히 일 벌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한다. 터키를 뒤로하고 돌아서니 커다란 진열대에 여러 종류의 파이들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다. 애플파이와 펌킨파이를 집어 바구니에 넣는다. 혼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와 달콤한 파이를 즐길 심산이다.

손님을 초대하지 않으면 남편은 친구들과 운동하러 나갈 것이다. 혼자 보내는 조용한 명절이 오히려 나에게는 풍요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가벼워진 내 걸음에도 즐거운 박자가 실린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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