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한옥마을에서 한 발짝 더…진짜 전주가 보인다

2023-01-06 (금) 전주=글 최흥수 기자
크게 작게

▶ 자박자박 소웁탐방 - 한옥마을 주변 전주 원도심

외지인에게 한옥마을은 전주 여행의 시작이자 끝으로 인식된다. 시내 남동쪽 풍남동 일대 700여 채의 기와집이 밀집한 국내 최대 규모의 한옥마을이다. 1910년 무렵부터 형성된 한옥마을은 경기전과 전동성당 등 역사와 멋을 동시에 간직한 여러 문화재를 품고 있다. 한옥뿐만 아니라 한식, 한지, 한복, 한방 등‘한(韓)스타일’이 집약된,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 알린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옥마을은 엄밀히 말해‘마을’보다‘상가’에 가깝다. 관광지로 정비하며 한옥의 규모는 크고 화려해졌지만, 본래 살던 주민들이 밀려나면서 주거지로의 기능은 쪼그라들었다. 한옥마을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삶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는 전주 원도심이다. 지난 22, 23일 전주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17년 만의 폭설이라 주민들은 불편이 컸지만, 여행객은 500년 조선왕조의 시발점인 전주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나라의 곳간 호남, 호남의 중심 전라감영

한옥마을을 남북으로 나누면 가운데쯤, 동서로 보면 서쪽 귀퉁이에 경기전과 전동성당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기와지붕과 서양식 벽돌 건물이 대조적이면서도 묘하게 조화롭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부르다 세종 때 경기전이라 명명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했고, 영조대에 왕실 종친의 먼 시조인 신라 사공공의 위패를 모시는 조경묘를 조성했다. 건물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해 여러 역사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했고, 여행객의 인증사진 장소로도 빠지지 않는 곳이다.

전동성당은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건립됐다. 호남 최초로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을 결합한 건물로 웅장함과 곡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여 당시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으로 평가받았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풍남문이다. 전주읍성의 남문으로 경기전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때 성곽과 성문을 복원해 명견루라 불렀다. 영조 43년(1767)에는 화재로 소실돼 다시 지으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했다. 그러나 구한말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며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다. 일부는 전동성당 주춧돌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모습은 1981년 복원한 것이다.

출입문인 내삼문 앞에 호남의 중요성을 각인한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국가군저개고호남(國家軍儲皆湖南),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나라의 군수품을 다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는 것이다’라는 의미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된 문장이다.

전라감영은 조선 초부터 500년 동안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관청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이 근대화 과정에서 없어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선화당도 1951년 폭발 사고로 불타 버렸다. 69년 만에 전라도의 위용을 되찾은 셈이지만 아직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내부 전시는 제법 짜임새 있다. 선화당 내부에는 1884년 미국 임시 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촬영한 과거 감영 사진 등을 디지털 병풍으로 선보인다. 선화당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군의 염원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지도자 전봉준은 정부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를 수용한 정부는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전봉준과 이곳 선화당에서 전주화약을 맺었다. 국내에서 민주주의가 최초로 실현된 상징적인 공간인 셈이다.

감영 뒤편 전주객사도 전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물이다. 원래 감영과 한 울타리에 있었지만, 그사이에 민가가 들어서고 도로가 나면서 현재는 분리된 상태다. 유려한 초서로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쓴 대형 현판이 돋보인다.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의 고향을 일컫는다. 전주가 바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주천 따라 한벽당과 오목대까지

풍남문에서 감영 반대편으로 조금만 나가면 전주천이다. 임실에서 발원해 전주 시내를 거쳐 만경강에 합류하는 물길로, 도심 하천을 생태적으로 복원한 성공 사례로 꼽힌다. 생활하수와 폐수로 오염된 하천이 1998년 생태하천으로 복원돼 현재 1급수의 맑은 물이 흐른다. 쉬리와 모래무지 등 희귀 물고기가 서식하고 천연기념물 수달과 원앙도 살고 있다.

남부시장 들머리 싸전다리에서 하천을 거슬러 오르면 물길이 휘어지는 언덕에 아담한 정자 하나가 올라앉아 있다. 한벽당(寒碧堂)이다. 이곳까지는 제방도로로 이동해도 되고, 전주천변 산책로를 걸으면 더욱 운치 있다. 남천교 위에 현대적 한옥 누각인 청연루(晴烟樓)가 이색적인 멋을 자아낸다. 한옥마을의 관문 역할을 하는 랜드마크로 한벽당과 대칭적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한벽당은 오래 전부터 수많은 문인과 유생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1770~1847)과 부채 장수 이야기는 지역에서 유명하다. 폭염이 쏟아지는 어느 날, 부채 장수가 한벽당 그늘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누군가가 부채에 글을 쓰고 있었다. 화가 난 장수는 부채가 팔리지 않으면 변상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성안으로 들어갔고, 부채는 값을 올려 받아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 선비가 다름 아닌 이삼만이었다는 얘기다.

한벽당 인근 전주향교도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창건해 조선 선조 36년(1603)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전주가 전라도의 수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주향교도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로 불렸다.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책판고 등 경내의 모든 건물을 합하면 총 99칸 대규모였다. 대성전과 명륜당 앞뜰에는 약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씩 자라고 있다. 은행잎이 마당을 노랗게 뒤덮는 가을 운치가 으뜸이지만, 눈 오는 겨울날 풍광도 그윽하다.

향교 뒤편 낮은 봉우리 정상에 오목대가 있다. 고려 우왕 6년(1380)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제법 규모가 큰 2층 누각과 함께 1900년 고종이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도로 건너편 기슭에는 이목대가 자리한다.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로 전주 이씨 시조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오목대 누각에 오르면 한옥마을이 코앞에 내려다보인다. 나뭇가지 때문에 시야가 확 트이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기와지붕에 소복하게 눈이 덮여 전주의 전통과 멋은 한층 도드라졌다. 둘레길이 정비 중이어서 내년 봄이면 한옥마을과 전주천변 풍광을 두루 살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주=글 최흥수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