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대망의 2023년 새해가 시작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무슨 동물의 해인지 궁금증이 발동해서 검색창을 눌러 보았다. 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라고 적혀있었다. 보려던 의도는 잊고 토끼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무단 침입을 일삼는 토끼 때문에 약이 바짝 오른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방팔방에 장착된 우리 집 CCTV에는 집 가꾸느라 바지런을 떠는 옆집 아주머니와 동물들이 주로 찍힌다. 그중 토끼가 단연 1위다. 출연료도 없는데 제일 많이 출연했으니 연말을 맞아 레드 카펫이라도 깔아줘야 할 모양이다.
집 주위에 뭔가가 출현하면 친절하신 센서가 감지하여 남편에게 보고한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엔 잘 안 깨는 사람이 그 알림음 소리엔 예민하다. 어제도 새벽에 벌떡 일어나 핸드폰 화면에서 꼬리가 긴 동물이 사라질 때까지 동선을 살폈다. 밥캣인 줄 알았는데 꼬리가 더 길다며 내내 구시렁거렸다. 날이 추워지니 먹을 게 없는지 오만 것들이 동네로 찾아든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밥캣은 가족 단위로 무리 지어 울타리 위로 넘어 다닌다. 사람을 봐도 무서워하지 않는 대단한 배포를 가졌다. 지역 커뮤니티 페이스북에 밥캣은 사람을 해치기도 하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올랐다. 그런 놈들이 찾아와 뒤뜰에서 어슬렁거리면 심장이 다 벌렁거린다.
울타리 밑으로 들어오는 토끼를 막으려고 나무를 덧대어 박고 구멍마다 막았는데도 어디로 들어오는지 제집처럼 들락거리니 남편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토끼는 잔디밭에 무지막지한 양의 똥을 싸 놓거나 잔디를 망가뜨리는 불청객이다. 이따금 살이라고는 한 점도 붙어있지 않은 뼈와 털이 널브러져 있어 섬뜩할 때가 있다. 밥캣의 소행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귀찮은 녀석들이긴 해도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면 약육강식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토끼 뼈를 치우는 것도 남편 몫이다.
크리스마스 무렵, 미 중서부에 몰아닥친 폭풍과 한파로 전기가 끊기고,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피해가 생겼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직 복구가 안 되었다니 걱정이다, 달라스도 갑자기 추워져 겨울이 오려나 했더니 낮 기온이 60~70도로 다시 올라갔다. 당분간은 동물들과의 전쟁이 계속될 것 같다. 언젠가 미시간에 사는 이모가 그랬다. 우리 동네처럼 오지게 추워야 벌레들이 싹 다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텍사스는 일 년 열두 달 벌레가 죽지를 않으니 독이 많은 거라고. 음! 정말 그런가?
2022년이 시작될 때도 무슨 해인지 찾아보았다. 흑 호랑이해였다. 드디어 나의 해라고 기뻐했다. 연초에 야무지게 대호를 꿈꾸었으나 대호는커녕 소호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누군가 내게 후회는 없었냐고 묻는다면 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보니 아마득하다.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냈을까. 일에 치여 밤을 낮 삼아 살았음에도 잘 버텨 준 몸이 고맙다. 대충이 안 되는 주인을 만나 늘 고생이다. 봉사도 좋지만 그러다 몸 상하겠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나를 염려해주는 분들의 기도 덕분에 잘 지낸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특히 문협에서 편집인으로 봉사했던 기간에 내 글은 못 쓰고 남의 글만 고치느라 잃은 것도 많았지만, 공부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책이 좋아졌더라는 칭찬을 들을 때면 고생했던 시간은 잊히고 보람이 느껴지곤 했다.
한길을 걷다 보니 좋은 일도 있었다. 상은 힘들 때마다 내 등을 도닥여 주던 엄마 손길처럼 처진 어깨를 세워주었다. 1회여서, 정지용 선생님의 함자가 들어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일복을 타고났는지 여전히 일이 많다. 올해 하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해 차기 이월을 해야 할 형편이지만, 괜찮다. 조금 늦으면 어떤가. 아름답게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다.
올해도 열심히 살 생각이다. 여전히 절룩이고 토끼처럼 보폭이 좁으나 새로 세운 골을 향해 완주를 목표로 뛰어보려 한다. 내 앞이 환했던 적은 없다. 자욱한 안개 끝에 무엇이 있는지 계산해 볼 겨를도, 비빌 언덕도 없었다. 문학은 좋아서 달려왔던 길이고 달려갈 길이다.
구구 선생님의 페이스북에 “예술가가 외롭다 외롭다 하는데, 이런 외로움도 없으면 어떻게 예술가를 하나”라는 글과 함께 캔버스에 지두화 그리는 사진을 올려놓았다. 코로나로 세상이 얼어붙었던 시간조차도 그는 그 공간에서 도인처럼 먹고 자며 하루에 18시간 이상을 창작에 몰두하며 보냈다. 아무도 없는 추운 공간에서 자신과 싸우며 만들어 낸 작품으로 어떤 결과를 이루었는지 알기에 그 말에 공감이 되었다. 그의 아트에 관한 기사가 신문의 전면에 실린 것은 요행이나 운이 아니다. “전 그 외로움이 너무 좋아요.”라고 댓글을 적었다. 창작을 위한 지독한 외로움이 나도 좋다. 창작의 고통을 어떻게 겨우 해산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수정되어야 할 말이다.
조금만 따뜻해지면 봄인 줄 알고 무궁화나무에 새순이 돋는다. 작은 초록 잎이 얼굴을 내밀 때마다 혹한이 몰려오면 얼어 죽을까 봐 걱정이 앞서는데, 정작 무궁화는 성장을 멈추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무궁화를 기르고 나서야 왜 국화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무궁화는 강인하고 번식이 빠르다. 무궁화 삼천리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듯하다. 어느 땅에서나 강인하게 뿌리내리고 살아남는 민들레를 닮았다. 자연이 주는 용기는 정직해서 좋다.
매년 이맘때면 초심으로 돌아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새해 그림을 그려본다. 다독 다작 다상량을 외치니 쌓아두고 째려보기만 했던 책들이 활짝 웃는 듯하다.
겨울 중의 봄이다.
<
박인애 / 시인·수필가>